오늘 한사람의 기자에게 다시 주목한다.
이 신유림이라는 한 여성기자의 펜은 지난 100년의 친일ㆍ매국ㆍ친군부독재ㆍ망국의 기득권과 궤를 같이 하는 '조ㆍ중ㆍ동'이라는 거대찌라시의 수천명의 기레기들의 펜의 무게보다 더 무겁고 예리하다.
그녀가 변하지 않고 추악한 기레기가 아닌, 이 나라의 언론인들 가운데 가장 기자다운 기자의 길을 걸어가길 기대한다.~^^
*****************♡♡♡********************
[토요경제 = 신유림 기자]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1776년 정조대왕은 즉위 첫날 조정의 노론 대신들에게 자신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이렇게 알렸다.
이는 사도세자를 죽이는 데 앞장섰던 노론에겐 청천벽력과 같은 선전포고였다.
노론, 그들은 남인을 몰락시키고 일당 독재를 완성했으며 재벌과 결탁해 모든 권력을 틀어쥐고 언론까지 주물렀던 그야말로 하늘도 두렵지 않은 기득권 세력이었다.
이 때문에 영조는 사도세자 사후 노론으로부터 당시 세손이었던 정조의 목숨과 신분의 정통성을 지키기 위해 이미 10살에 요절한 자신의 첫째 아들이자 사도세자의 이복형이었던 효장세자의 양아들로 입적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암살 위협에 시달리며 천신만고 끝에 왕위에 오른 정조, 하물며 감히 사도세자의 이름조차 언급하면 안 됐던 그가 즉위하자마자 내뱉은 말이 아버지의 복수라니.
이후 노론에 의해 벌어진 암살 시도는 그의 즉위 일성이 얼마나 위험한 것이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런 환경에서 정조는 어떻게 왕권을 강화했고 어떻게 조선 최고의 개혁 군주라는 칭송을 받게 됐을까.
철옹성 같은 기득권 카르텔을 깨고 개혁하는 것, 그건 자신의 목숨을 앗아갈 만큼 험난한 길이었다.
우선 정조는 손에 피를 묻혔다.
노론 권력가와 그 조력자들, 심지어 외척까지 철저히 도륙했다. 이종사촌 정후겸, 외할아버지 홍봉한, 홍인한이 바로 그들이다.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의 오빠 김귀주도 제거했다.
이렇듯 정조는 기득권 척살을 위해선 가족도 용서하지 않았다.
또 지금의 언론, 검찰에 해당하는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관료들도 가차없이 날렸다.
왕에게 옳은 말 하지 않고 노론의 눈치나 보며 그들과 한패가 된 부도덕한 무리였기 때문이다.
“너희를 어찌 언론이라 할 수 있겠느냐.”
개혁의 백미는 경제개혁과 부정부패 척결이었다.
지금의 재벌에 해당하는 시전을 개혁, 그들과 노론의 단단한 협잡의 사슬을 끊었다.
검은돈이 없으면 권력은 몰락하기 마련. 신해통공 즉 금난전권 철폐가 바로 그것이다.
당시 조선의 모든 시장 권력을 잡고 있던 세력은 국가의 허가를 받고 장사하는 시전상인들이었다.
종로를 본거지로 둔 그들은 전국에서 올라오는 모든 특산품목을 독점해 엄청난 부를 쌓은 400년 묵은 적폐였다.
그리고 그 돈은 자신들과 결탁한 노론에 정치자금으로 흘러갔다.
더욱이 그들은 금난전권을 이용, 일반 백성의 난전을 물리력으로 뒤엎고 핍박했다. 심지어 본업인 장사보다 난전을 깨부수는 일에 더 열성적이기도 했다.
자연히 백성들의 삶은 더욱 곤궁해졌다. 하지만 노론과 시전상인들은 정경유착을 통해 손쉽게 부를 늘렸다.
이를 두고 볼 수 없었던 정조는 거센 저항을 뚫고 금난전권을 철폐하는 결단을 내렸다. 비단, 어물, 종이, 모시, 명주, 면포 등 6개 품목을 제외한 모든 독점권을 빼앗아 어느 백성이든 자유롭게 상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했다.
이는 노론에게 제공되던 정치자금이 끊어지는 결과를 낳았을 뿐만 아니라 많은 백성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노론이 폭발한 건 당연했다.
마침내 정조는 노론을 배척하기로 결심했다.
더는 그들과 더불어 정치를 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일찍부터 규장각에서 남인과 서얼들을 키우던 정조는 노론의 배후였던 산림의 정치 간섭을 막아 세를 위축시켰다. 이어 남인의 대거 등용을 선포했다.
하지만 너무 과했던 탓일까.
1800년 6월 정조는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았다. 남인으로의 정권교체를 불과 1개월 앞둔 시점이었다. 노론이 저지른 살인이다.
결국, 경기도 화성에서 조선의 유토피아를 꿈꿨던 정조의 꿈도 그렇게 끝나고 말았다. 그리고 노론은 부활했다.
이후 조선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11세에 불과한 순조의 뒤에서 수렴청정한 정순왕후는 그간 정조가 이룩한 모든 것을 하나씩 깨나갔다.
자신의 오빠가 죽은 것에 대한 복수극이었다.
이어 헌종, 철종 대까지 계속된 60년 세도정치, 200년 노론 일당 독재의 폐해는 결국 조선을 재기불능으로 만들었다.
역사는 반드시 반복된다.
기자는 현대판 노론이 판치는 지금의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할 길을 정조에게서 찾고자 했다.
주역 64괘 중 정조가 가장 좋아했다는 ‘화천대유’(하늘의 도움으로 천하를 얻는다)와 ‘천화동인’(같은 마음으로 도모하여 일을 성취한다).
하필이면 그 이름을 딴 회사로 인해 현재 대한민국은 혼돈에 휩싸였다.
여기에는 가짜뉴스와 온갖 음해 그리고 이재명 몸통-설계자-배임설로 이어지는 논리적 오류가 난무한다. ‘이재명이 판을 깔아 국민의힘이 돈을 먹었다’는 헛웃음 나오는 명제를 증명하기 위해 그들은 무던히도 애를 쓴다.
그러다 보니 ‘인지 오류’, ‘인지 부조화’가 발생한다. 왜? 그들의 논리 체계에선 이재명이 반드시 뒷돈을 받았어야 했기 때문이다.
‘조선일보 아웃’과 ‘부패 기득권과의 최후 대첩’을 선포한 이재명 지사, 우려스러운 건 정조와 노무현이 그랬듯 그것은 어쩌면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위험한 길이라는 것이다.
이재명 지사께 감히 한 말씀 드린다.
대한민국 대개혁을 위해 기꺼이 그 손에 피 묻히는 걸 주저하지 마시기를. 그리고 역사의 과오를 되풀이하면 안 된다는 것을.
이 신유림이라는 한 여성기자의 펜은 지난 100년의 친일ㆍ매국ㆍ친군부독재ㆍ망국의 기득권과 궤를 같이 하는 '조ㆍ중ㆍ동'이라는 거대찌라시의 수천명의 기레기들의 펜의 무게보다 더 무겁고 예리하다.
그녀가 변하지 않고 추악한 기레기가 아닌, 이 나라의 언론인들 가운데 가장 기자다운 기자의 길을 걸어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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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경제 = 신유림 기자]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1776년 정조대왕은 즉위 첫날 조정의 노론 대신들에게 자신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이렇게 알렸다.
이는 사도세자를 죽이는 데 앞장섰던 노론에겐 청천벽력과 같은 선전포고였다.
노론, 그들은 남인을 몰락시키고 일당 독재를 완성했으며 재벌과 결탁해 모든 권력을 틀어쥐고 언론까지 주물렀던 그야말로 하늘도 두렵지 않은 기득권 세력이었다.
이 때문에 영조는 사도세자 사후 노론으로부터 당시 세손이었던 정조의 목숨과 신분의 정통성을 지키기 위해 이미 10살에 요절한 자신의 첫째 아들이자 사도세자의 이복형이었던 효장세자의 양아들로 입적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암살 위협에 시달리며 천신만고 끝에 왕위에 오른 정조, 하물며 감히 사도세자의 이름조차 언급하면 안 됐던 그가 즉위하자마자 내뱉은 말이 아버지의 복수라니.
이후 노론에 의해 벌어진 암살 시도는 그의 즉위 일성이 얼마나 위험한 것이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런 환경에서 정조는 어떻게 왕권을 강화했고 어떻게 조선 최고의 개혁 군주라는 칭송을 받게 됐을까.
철옹성 같은 기득권 카르텔을 깨고 개혁하는 것, 그건 자신의 목숨을 앗아갈 만큼 험난한 길이었다.
우선 정조는 손에 피를 묻혔다.
노론 권력가와 그 조력자들, 심지어 외척까지 철저히 도륙했다. 이종사촌 정후겸, 외할아버지 홍봉한, 홍인한이 바로 그들이다.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의 오빠 김귀주도 제거했다.
이렇듯 정조는 기득권 척살을 위해선 가족도 용서하지 않았다.
또 지금의 언론, 검찰에 해당하는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관료들도 가차없이 날렸다.
왕에게 옳은 말 하지 않고 노론의 눈치나 보며 그들과 한패가 된 부도덕한 무리였기 때문이다.
“너희를 어찌 언론이라 할 수 있겠느냐.”
개혁의 백미는 경제개혁과 부정부패 척결이었다.
지금의 재벌에 해당하는 시전을 개혁, 그들과 노론의 단단한 협잡의 사슬을 끊었다.
검은돈이 없으면 권력은 몰락하기 마련. 신해통공 즉 금난전권 철폐가 바로 그것이다.
당시 조선의 모든 시장 권력을 잡고 있던 세력은 국가의 허가를 받고 장사하는 시전상인들이었다.
종로를 본거지로 둔 그들은 전국에서 올라오는 모든 특산품목을 독점해 엄청난 부를 쌓은 400년 묵은 적폐였다.
그리고 그 돈은 자신들과 결탁한 노론에 정치자금으로 흘러갔다.
더욱이 그들은 금난전권을 이용, 일반 백성의 난전을 물리력으로 뒤엎고 핍박했다. 심지어 본업인 장사보다 난전을 깨부수는 일에 더 열성적이기도 했다.
자연히 백성들의 삶은 더욱 곤궁해졌다. 하지만 노론과 시전상인들은 정경유착을 통해 손쉽게 부를 늘렸다.
이를 두고 볼 수 없었던 정조는 거센 저항을 뚫고 금난전권을 철폐하는 결단을 내렸다. 비단, 어물, 종이, 모시, 명주, 면포 등 6개 품목을 제외한 모든 독점권을 빼앗아 어느 백성이든 자유롭게 상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했다.
이는 노론에게 제공되던 정치자금이 끊어지는 결과를 낳았을 뿐만 아니라 많은 백성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노론이 폭발한 건 당연했다.
마침내 정조는 노론을 배척하기로 결심했다.
더는 그들과 더불어 정치를 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일찍부터 규장각에서 남인과 서얼들을 키우던 정조는 노론의 배후였던 산림의 정치 간섭을 막아 세를 위축시켰다. 이어 남인의 대거 등용을 선포했다.
하지만 너무 과했던 탓일까.
1800년 6월 정조는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았다. 남인으로의 정권교체를 불과 1개월 앞둔 시점이었다. 노론이 저지른 살인이다.
결국, 경기도 화성에서 조선의 유토피아를 꿈꿨던 정조의 꿈도 그렇게 끝나고 말았다. 그리고 노론은 부활했다.
이후 조선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11세에 불과한 순조의 뒤에서 수렴청정한 정순왕후는 그간 정조가 이룩한 모든 것을 하나씩 깨나갔다.
자신의 오빠가 죽은 것에 대한 복수극이었다.
이어 헌종, 철종 대까지 계속된 60년 세도정치, 200년 노론 일당 독재의 폐해는 결국 조선을 재기불능으로 만들었다.
역사는 반드시 반복된다.
기자는 현대판 노론이 판치는 지금의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할 길을 정조에게서 찾고자 했다.
주역 64괘 중 정조가 가장 좋아했다는 ‘화천대유’(하늘의 도움으로 천하를 얻는다)와 ‘천화동인’(같은 마음으로 도모하여 일을 성취한다).
하필이면 그 이름을 딴 회사로 인해 현재 대한민국은 혼돈에 휩싸였다.
여기에는 가짜뉴스와 온갖 음해 그리고 이재명 몸통-설계자-배임설로 이어지는 논리적 오류가 난무한다. ‘이재명이 판을 깔아 국민의힘이 돈을 먹었다’는 헛웃음 나오는 명제를 증명하기 위해 그들은 무던히도 애를 쓴다.
그러다 보니 ‘인지 오류’, ‘인지 부조화’가 발생한다. 왜? 그들의 논리 체계에선 이재명이 반드시 뒷돈을 받았어야 했기 때문이다.
‘조선일보 아웃’과 ‘부패 기득권과의 최후 대첩’을 선포한 이재명 지사, 우려스러운 건 정조와 노무현이 그랬듯 그것은 어쩌면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위험한 길이라는 것이다.
이재명 지사께 감히 한 말씀 드린다.
대한민국 대개혁을 위해 기꺼이 그 손에 피 묻히는 걸 주저하지 마시기를. 그리고 역사의 과오를 되풀이하면 안 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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