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두술과 정약용 |
황 상 익 (서울대 의과대학 교수) |
지금까지 인간의 노력으로 퇴치한 질병은 두창(천연두)뿐이다. (머지않아 소아마비가 두번째로 사라질 것으로 예견된다.) 두창은 1977년 10월에 소말리아에서 환자가 발생한 뒤로 지금까지 단 한명의 환자도 생기지 않았다. 세계보건기구(WHO)는 마지막 환자 발생 2년 반 뒤인 1980년 5월 두창이 완전히 퇴치되었다고 선포했다. 우리나라에서 두창이 사라진 것은 1960년대 초이다. 1961년에 마지막 환자가 보고된 이래 더 이상 두창 발생이 없었다. 하지만 그보다 조금 앞서까지도 두창은 크나큰 피해를 주곤 했다. 해방 이후만 해도 1946년, 1949년, 1951년에 크게 유행했는데, 특히 전쟁통인 1951년이 가장 심해서 환자가 4만명을 넘었고 사망자도 1만1천여명을 헤아려 치사율이 27%나 되었다. 60년 전만 하더라도 두창은 걸리면 4분의 1가량이 목숨을 잃는 무서운 병이었다. 두창, 인간의 노력으로 퇴치한 유일한 질병 동서를 막론하고 두창은 오랜 동안 가장 무서운 질병 가운데 하나였다. 조선 후기에 해당하는 17~19세기에도 수시로 창궐하는 무서운 역병(전염병)이었다. 치사율이 30~40%나 되는 경우가 흔했고 살아남더라도 마비 증상 등 무서운 후유증을 남기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두창하면 생각나는 ‘곰보’는 후유증 중에서는 오히려 가벼운 편이었다. 인류가 두창을 퇴치할 수 있었던 것은 우두술이라는 예방방법이 있었기 때문이다. 두창의 확실한 정체와 발병 원인(두창 바이러스)을 알게 된 것은 20세기 초였지만, 예방법은 그보다 훨씬 앞서 등장했다. 우두술은 흔히 영국인 의사 에드워드 제너(Edward Jenner)가 1796년에 처음으로 접종에 성공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그보다 20여년 앞서 벤저민 제스티라는 영국 농민(직업적 의사가 아닌)이 두창이 유행할 때 자기 가족에게 우두 접종을 하여 효과를 거둔 바가 있었다. 하지만 우두술을 보다 안전한 것으로 개발하고 또 널리 보급시킨 것은 두말할 것 없이 제너의 공적이다. 우리는 두창 예방법으로 우두술을 떠올리지만 그것 외에 인두술도 있다. 말 그대로 우두술(牛痘術)은 소의 두창(우두, cowpox)을 접종하는 것이고, 인두술(人痘術)은 사람의 두창(인두)을 접종하는 방법이다. 요컨대 종두술에는 우두술과 인두술 두 가지가 있다. 우두술은 18세기 후반 영국에서 개발된 비교적 역사가 짧은 것인 데에 반해, 인두술은 그보다 훨씬 앞서 인도와 중국에서부터 쓰이기 시작했다. 누가, 언제 인두술을 개발했는지 확실치 않은데 대략 서기 1000년 무렵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인두술이 터키를 통해 영국과 그밖의 유럽 나라들로 전해진 것은 1720년대이다. 인두술의 운명은 순탄하지 않았다. 효과가 없는 경우가 적지 않았고 부작용이 큰 문제가 된 적도 많았다. 인두술은 종종 약이 아니라 독이었다. 하지만 우두술이 보급되기 전까지 인두술이 기여한 바도 인정해야 한다. 두창 퇴치를 위한 정약용의 탐구와 성과 인두술이 우리나라에 알려진 것은 언제였을까? 정약용의 「종두설(種痘說)」에 의하면 1790년대 말로 여겨진다. 바로 이웃한 중국에서 몇백년 전부터 쓰이던 인두술이 유럽보다도 나중에야 알려진 것이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종두설」(박석무 옮김)은 이렇게 시작된다. “『강희자전』에는 ‘신통한 종두법에서는 무릇 두즙(痘汁)을 코에 넣어 호흡하면 나간다’라고 되어 있는데 … 우리나라에 전해지지 않음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었다.” 정약용은 『강희자전』을 통해 인두술(종두법)의 존재를 알고는 있었지만 구체적인 내용을 몰라 아쉬워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중국에서 간행된 「정씨 종두방(鄭氏種痘方)」을 1799년에 구해보았지만 몇 장에 지나지 않는 간략한 것으로 궁금증을 다 풀 수 없었다. 정약용은 이듬해 박제가에게서 중국 의서 『의종금감(醫宗金鑑)』(1742년) 중의 「종두요지」를 얻게 되고 두 책을 종합해서 「종두방(種痘方)」을 펴냈지만 탄압을 받는 시기에 분실하고 만다. 정약용의 대표적인 의학서 『마과회통(麻科會通)』 속의 「종두요지」가 이 종두방과 같은 것으로 여겨지는데 분실했던 것을 찾았거나 다시 서술한 것일 터이다. 요컨대 정약용은 우리나라 사람으로 인두술에 관해 최초로 저술해서 본격적으로 소개했으며, 그의 저술은 이종인의 『시종통편(時種通編』(1817년)으로 발전한다. 정약용은 인두술뿐만 아니라 우두술도 최초로 소개한 인물이다. 1828년 중국에서 간행된 토마스 스탠튼(Thomas Stanton)의 한역(漢譯) 우두 지침서 「신증종두기법상실(新證種痘奇法詳悉)」을 자신의 『마과회통』 부록에 수록한 것이다. 정약용이 우두술의 내용을 소개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시술까지 했을 가능성을 거론하고 있지만, 우두 시술에 꼭 필요한 두묘(痘苗) 취득 등을 생각해볼 때 가능성은 많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정약용은 『마과회통』 서문에서 사대부로서 정치 일선에 나가 백성을 살리는 것과 의술로 백성을 살리는 것이 한 가지임을 설파했는데, 두창 퇴치 방법을 끊임없이 탐구하고 모색한 데에서도 정약용의 정신과 활동이 잘 드러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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