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이야, 셰익스피어 최고의 로맨틱 코미디
레이턴 Edmund Blair Leighton (1853—1922)
올리비아 Olivia (1888)
바이올라: 아가씨, 얼굴을 보여주세요.
올리비아: 내 얼굴과 협상하라는 명령이라도 그대 주인께서 내렸나요? 본문에서 벗어나는군요. 하지만 커튼을 올리고 그림을 보여드리겠어요. (베일을 벗는다) 자, 보세요. 이렇게 생겼답니다. 잘된 작품 아닌가요?
(중략)
바이올라: 이제 보니 아가씨는 너무 오만하시군요. 하지만 아가씨가 설령 악마라고 해도 아가씨는 아름다우십니다. 저의 주인께서 아가씨를 사랑하십니다. 아, 그만한 사랑에는 보답이 없을 수 없습니다, 아가씨가 비할 데 없는 아름다움을 지니셨다고 해도요.
올리비아: 그분이 어떻게 나를 사랑하시는데요?
바이올라: 숭배와 진한 눈물과 천둥 치는 신음과 불의 한숨으로요.
올리비아: 그대 주인께서는 내 마음을 알고 계세요. 나는 그분을 사랑할 수 없어요. 그분이 덕망 있고 고귀하고, 막대한 재산과 흠 없는 젊음을 지닌 분이라는 걸 잘 알지만 말이에요. (중략) 이 대답은 이미 오래 전부터 받고 계실 텐데요.
오늘은 셰익스피어 William Shakespeare (1564-1616) 의 희극 중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십이야 Twelfth Night (1600)”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원래는 진짜 십이야 (1월 6일 밤) 에 이 글을 올리려고 했었는데 2주나 늦게 올리게 됐네요. ^^; 십이야는 크리스마스로부터 12일째 밤을 가리키는데, 유럽에서는 이때까지가 크리스마스 축제 기간이라고 합니다. 원래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에는 이때를 성탄절로 쳤고 지금도 동방 정교는 그 전통을 따른다고 하네요. 이 희극은 바로 십이야에 엘리자베스 1세 어전에서 상연된 작품이라서 이런 제목이 붙었다고 해요.
올리버 Isaac Oliver
“십이야”가 초연된 1600년 경 그려진 엘리자베스 1세의 초상
(사실 이때 여왕은 70에 가까운 나이였지만 이렇게 젊은 시절의 모습으로 그려졌답니다)
대강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쌍둥이 남매인 바이올라 Viola 와 세바스찬 Sebastian 은 난파를 당해서 서로의 생사를 모른 채 일리리아 Illyria 라는 곳에 닿게 됩니다. 바이올라는 일자리를 찾다가 이 지역을 다스리는 공작 오시노 Orsino 의 시종으로 들어가게 되죠. 남장을 한 채 시자리오 Cesario 라는 가명으로 말이에요. 오시노는 바이올라를 총명한 미소년이라고 생각하고 매우 아낍니다. 그러다가 자신의 구혼을 계속 거절하고 있는 아름다운 여백작 올리비아 Olivia 에게 사랑의 사자로 바이올라를 보냅니다.
사실 그새 바이올라는 공작을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에 속으로 가슴 아파하지만,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려고 애씁니다. 그녀는 공작의 사자를 더 이상 받지 않으려는 올리비아의 집에 기를 쓰고 들어가서 재치 있고 열정적인 말로 공작의 사랑을 전하죠. 그런데 그 효과는 이상하게 나타납니다. 올리비아가 공작이 아닌 바이올라에게 반해버린 거죠 - 물론 바이올라가 시자리오라는 남성이라고 생각하고.
올리비아는 바이올라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바이올라는 난감해 하면서 자신이 아닌 공작을 사랑해 달라고 합니다. 사실상 자신의 연적인 여인에게서 사랑을 받으면서, 그 여인에게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결합하라고 설득해야 하는... 정말 괴상한 처지에 놓여버린 거죠. 물론 올리비아는 고집을 부리며 바이올라에 대한 사랑을 꺾지 않습니다.
데브럴 Walter Howell Deverell (1827 - 1854)
십이야, 2막 4장 (1840)
(올리비아를 생각하며 괴로워하는 오시노 공작의 모습입니다. 한쪽에서는 올리비아의 광대가 발라드를 불러 분위기를 잡고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바이올라가 걱정스럽게 그를 지켜보고 있죠.)
한편 올리비아의 또 다른 구혼자인 멍청한 기사 앤드루 경 Sir Andrew Aguecheek 은 바이올라에게 질투를 느껴서 결투를 신청합니다. 바이올라는 몹시 당황하고, 앤드루는 사실 자신이 겁쟁이였지만, 그걸 보고 역시 연약한 미소년일 뿐이라고 만만하게 여기게 되죠. 하지만 그가 정작 결투장에서 공격한 상대는 우연히 거길 지나던 세바스찬이었습니다. 남장한 바이올라의 모습이 쌍둥이 오빠 세바스찬과 똑같았거든요. (사실 남녀 쌍둥이는 이란성이라서 얼굴이 똑같지 않은데... 설정이 그렇습니다. ^^)
앤드루는 기세 좋게 한 대 날렸다가, 갑자기 낯선 사람에게서 맞아 화가 난 세바스찬에게 보기 좋게 얻어터집니다. 이때 올리비아가 말리러 나오고 세바스찬은 올리비아에게 한눈에 반하죠. 역시 세바스찬을 바이올라로 착각한 올리비아는 그가 전과 다르게 다정한 것을 보고 기뻐하며 결혼하자고 합니다. 세바스찬은 앞뒤 가릴 것 없이 좋다고 결혼식을 올리고요. (이것도 좀 말이 안 됩니다만. ^^)
마침내는 공작이 직접 올리비아를 찾아오는데, 그녀에게서 시자리오(바이올라)와 결혼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죠. 공작은 배신감에 치를 떨고, 바이올라는 황당해 하며 아니라고 부인하고, 그러자 올리비아 또한 배신감에 치를 떨고... 이 엉망으로 꼬인 상황에 다시 세바스찬이 나타나 엉킨 실타래가 풀립니다. 남매는 감격적으로 상봉하고, 바이올라가 여자라는 것과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공작은 바이올라와 결혼하기로 마음먹습니다. 그래서 두 쌍의 커플이 탄생하며 이야기는 해피엔딩으로 맺어집니다.
제가 “십이야”를 좋아하는 이유는 우선 이 이야기가 희극답게 정말 유머스럽기 때문입니다. 위에 소개한 줄거리는 아주 단순하게 요악한 것이고, 원래는 재미있는 조연들이 더 껴서 이야기가 좀더 복잡하게 전개됩니다. 그 조연들은 올리비아의 삼촌으로 술고래에 장난을 좋아하는 토비 경 Sir Toby Belch, 올리비아의 시녀이며 재기발랄한 머라이어 Maria, 올리비아의 광대, 그리고 이들이 작당해서 하는 장난에 처절한 희생양이 되는 올리비아의 깐깐한 속물 집사 맬볼리오 Malvolio 등등입니다. 그리고 앤드루 경도 빼놓을 수 없겠죠. 저는 앤드루가 등장하는 대목이 특히 웃겼답니다.
해밀턴 William Hamilton (1751-1801)
술에 취해 흥청거리는 토비 벨치 경과 앤드루 애구치크 경 (1792)
머라이어가 앤드루에 대해 말하는 걸 들어보세요.
“아무렴, 여러가지로 타고난 분이죠. 바보에다 대단한 싸움꾼이잖아요. 그나마 타고난 비겁함이 싸움 기질을 눌러줘서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벌써 황천길로 갔을 거라고 똑똑한 사람들은 다 그러던데요.”
(이런 사람 주변에 하나쯤 있지 않아요? 툭하면 시비에 싸움질이면서도 겁도 많은... ㅎㅎ)
토비와 앤드루는 밤마다 실없는 농담을 하며 술을 퍼마시죠.
토비: 자, 이쪽으로, 앤드루 경. 한밤중이 지나도록 잠자리에 안 들었으니 이건 일찍 일어난 것과 마찬가지요. 댁도 알다시피.
앤드루: 아니, 난 모르는데요. 내가 아는 거야 밤 늦게까지 안 자고 있으면 늦게까지 안 자고 있는 거라는 거지.
여기에 광대까지 합세를 해 노래를 불러대곤 합니다.
앤드루: 우리 돌림노래는 "임마"로 하자.
광대: "닥쳐라, 임마"란 노래 말씀이죠? 그 노래를 하자면 제가 나리를 부득이 임마라고 부르게 되겠는뎁쇼?
앤드루: 나를 부득이 임마라고 한 건 자네가 처음이 아니야. 시작해, 광대. 이렇게 시작해야지. "닥쳐라"
광대: 닥쳐라 하는데 어떻게 시작해요?
이런 식으로 노닥거리고 있으면 언제나 집사 맬볼리오가 와서 훼방을 놓죠. 그들은 맬볼리오가 성인군자인 척 하기는 하지만 사실 출세지향적인 속물이라는 걸 알고 그걸 이용해서 곯려주기로 합니다. 올리비아의 필체로 쓰여진 가짜 연애편지를 맬볼리오가 다니는 길목에 떨어뜨려 놓아서, 올리비아가 맬볼리오에게 마음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 것이죠. 맬볼리오는 올리비아와 결혼해 백작이 될 거라는 희망에 부풀어서, 편지에 지시된 대로 노란 양말을 신고 십자형으로 대님을 매고 만면에 미소를 띄운 채 올리비아 앞에 나섭니다. 올리비아는 평소 점잖던 집사가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요란한 패션을 하고 히죽히죽 웃고 있는 걸 보고, 그가 가엾게도 미쳐버렸다고 생각하고 방에 가두고 치료하라 이르지요. ^^
"십이야"는 이야기가 크게 두 가지 축으로 전개되는데, 한 축은 이렇게 코믹한 조연들이 중심이 되고 다른 한 축은 로맨틱하면서도 위트가 있는 주연인 바이올라와 올리비아가 중심이 되죠. 이 두 축의 이야기가 정교하게 얽혀서 진행됩니다. 이처럼 "십이야"는 플롯이 탄탄하고, 개성 넘치는 인물들이 많이 등장하기에, 많은 비평가들이 가장 탁월한 셰익스피어 희극으로 꼽는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희극의 매력은 두 여주인공이 주고받는 재치가 번뜩이는 대화에 있습니다. 셰익스피어의 로맨틱 코미디에서는 남녀 주인공이 입심 대결을 벌이기 마련인데, 여기서는 이야기 전개 상 두 여성이 그 대결을 하죠.
베일을 벗는 올리비아 (1874)
프리스 William Powell Frith (1819-1909)
폴저 셰익스피어 박물관 소장
다음은 바이올라가 처음 올리비아를 찾아왔을 때의 대화입니다.
바이올라: 제가 누구이고 무슨 일로 왔는지는 처녀의 정조만큼이나 비밀입니다. 아가씨의 귀에는 신성하지만, 다른 사람 귀에 들어가는 것은 신성모독이거든요.
올리비아: 모두들 비켜줘요, 그 신성한 말씀을 들어볼 테니. 자, 그 본문은?
바이올라: 감미로운 아가씨...
올리비아: 기분 좋은 교리군요, 그리고 좀 장황해지겠네요. 어디에 근거한 본문이죠?
바이올라: 오시노의 가슴 속에요.
올리비아: 그분 가슴 속에! 그 가슴 속 어느 장에?
바이올라: 그런 식으로 말씀드리자면 그분 심장 제1장에.
올리비아: 아, 벌써 읽어봤어. 이단이에요. 더 할 이야기가 있나요
그리고 이건 바이올라가 두 번째로 올리비아를 찾아왔을 때의 대화죠.
올리비아: 이름이 뭐죠?
바이올라: 이 충복의 이름은 시자리오입니다, 아름다운 공주님.
올리비아: 내 충복? 짐짓 몸을 낮추는 게 의례가 된 다음부터는 세상이 전혀 재미있지가 않아요. 그대는 오시노 공작의 충복일 텐데요, 젊은 분.
바이올라: 그리고 그분은 아가씨의 충복이니 그분의 것은 아가씨의 것입니다. 아가씨의 충복의 충복은 아가씨의 충복인 거죠.
올리비아: 그분으로 말하자면, 조금도 내 마음에 없어요. 그분 마음 역시, 나에 대한 일로 차 있지 말고 백지였으면 좋겠어요!
바이올라: 아가씨, 제가 온 건 그분을 위해 아가씨의 부드러운 마음을 돋우기 위해서입니다.
올리비아: 아, 잠깐만, 부탁 드려요. 제발 그분에 대해서는 다시 말하지 말아줘요. 하지만 다른 청을 한다면 천체의 음악보다도 기꺼이 귀를 기울이겠어요.
바이올라: 아가씨...
올리비아: (중략) 당신 같은 분이면 벌써 눈치챘겠지만 내 마음은 얇은 한 겹으로만 감추어져 있어요. 그러니, 뭐라고 말해보세요.
바이올라: 아가씨를 동정합니다.
올리비아: 사랑의 첫걸음이군요.
바이올라: 아니, 천만의 말씀. 흔한 예로 때로 원수도 동정하죠.
올리비아: 저런, 그럼, 다시 웃기나 해야겠군요.
후크 James Clarke Hook (1819-1907)
올리비아와 바이올라
그리고 이 두 여주인공 모두 매력적입니다. 먼저 바이올라의 경우, 자신이 짝사랑하는 남자를 다른 여자와 맺어주는 역할을 떠맡게 되지만, 그 남자의 신뢰를 저버릴 수 없기에, 꼼수를 쓰거나 하지 않고 묵묵히 임무를 다합니다. 참 고결하고 성실한 사람이에요. 그냥 억지로 하는 수준이 아니라 능력을 발휘해 대담하고 재치 있는 언동으로 올리비아의 마음을 흔들어놓죠. 본의 아니게 그 흔들린 마음이 공작이 아닌 자신에게 향하게 되지만. ^^ 하지만 정작 자신의 짝사랑을 제대로 드러내지는 못해요. 그녀는 일에는 뛰어나고 사랑에는 서투른 현대의 전문직 여성을 연상케 하기도 합니다. 흔히 바이올라는 이 희극에서 주인공 중의 주인공으로 여겨지고 명배우들이 바이올라 역을 했어요.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로 유명한 배우 비비안 리 Vivien Leigh (1913-1967) 도 바이올라 역을 했습니다.
1955년 상연된 “십이야”에서 비비안 리 (오른쪽)
또 90년대 초에 나온 “셰익스피어 인 러브 Shakespeare in Love”라는 영화에서는 셰익스피어가 자신이 사랑한 여인이 남장을 했던 데서 착상을 얻어 그 여인을 모델로 바이올라를 창조하고 “십이야”를 썼다는 설정이 나오죠. (이건 허구입니다만)
하지만 제가 개인적으로 더 좋아하는 쪽은 올리비아랍니다. 좀 경솔하고 바보 같아 보일 수도 있지만요. 잘못 알고 여자를 사랑하고는 또 다시 잘못 알고 남자와 결혼하잖아요. ^^ 하지만 그녀는 결코 얄팍한 인물이 아닙니다. 그녀는 타고난 여백작이에요. 열정적이고 대담한 성격 때문에 실수도 하지만, 그만큼 카리스마 있고 또 관대하게 집안 사람들을 잘 통솔하기도 합니다. 그녀의 그런 성격은 광대와 맬볼리오와 나누는 대화에서도 잘 드러나요.
올리비아: 이 광대를 어떻게 생각해요, 맬보리오? 좀 발전하지 않았어?
맬보리오: 네, 아마 늙어 죽음의 고통에 몸부림치는 순간까지 발전할 겁니다. 노환은 똑똑한 사람은 못쓰게 만들지만 바보는 더 제대로 바보로 만들어주니까요.
광대: 하느님, 이분께 하루 바삐 노환을 내려주소서, 저 어리석음이 더해지도록. 토비 경은 내가 여우가 아니라는 데는 보증을 할지 몰라도 댁이 바보가 아니라는 데는 두 푼도 걸지 않을걸요.
올리비아: 저 말에 어떻게 반격할 거지, 맬볼리오?
맬보리오: 고귀한 아가씨께서 이런 재미없는 건달의 이야기를 즐기시다니 놀라울 따름입니다. (중략) 아가씨께서 웃고 기회를 주시니 그렇지, 아니면 입에 재갈이 물렸을 놈입니다. 단언하건대, 현명한 사람들일지라도 이따위 어릿광대들을 보고 폭소하면 결국 광대의 보조역보다 나을 게 없습니다.
올리비아: 아, 그대는 자존심이 과민해 병이 된 거예요, 맬볼리오. 그러니 아무 것도 입맛에 맞질 않지. 너그럽고 거리낌이 없고 자유로운 기질의 사람이라면 새총알로밖에 여기지 않을 것을 그대는 대포알로 여기는 거야. 광대가 좀 욕을 한다고 해도 그건 명예훼손이 아니에요. 마치 사려 깊기로 유명한 사람이 나무란다고 해서 그게 욕이 아닌 것처럼.
Oh, you are sick of self-love, Malvolio, and taste / with a distempered appetite. To be generous, / guiltless and of free disposition, is to take those things for bird-bolts that you deem cannon-bullets: / there is no slander in an allowed fool, though he do / nothing but rail; nor no railing in a known discreet / man, though he do nothing but reprove.
희곡을 읽다 보면 올리비아의 말투는 언제나 좀 오만합니다. 하지만 그 오만한 말투는 타인을 깔보는 식이 아니라 타고난 자신감의 솔직한 표현이라서 듣기 싫지가 않습니다. 그녀는 공작에게건 공작의 사자에게선 자기 집안 사람들에게건 한결같이 대합니다. 언제나 좀 도도하지만 따뜻하고 솔직하게요. 저는 그런 올리비아가 셰익스피어의 희극 비극 통틀어 모든 여성 캐릭터 중에서 가장 좋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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