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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도 아프지만 ‘작별상봉’은 더 아프다

yjh09 2014. 3. 12. 10:36

이별도 아프지만 ‘작별상봉’은 더 아프다

 

  남북 이산가족들의 상봉, 참으로 우여곡절 끝에 이뤄졌으나, 그렇게라도 만날 수 있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이던가요. 그러나 만남의 기쁨이야 컸지만, 상봉 뒤의 이별은 또 얼마나 슬픈 일이던가요. 이산가족들의 상봉과 이별광경을 뉴스를 통해서 보면서 지구상에서 대한민국과 북한처럼 불행한 나라가 어디에 또 있을까라는 생각에 괜스레 마음이 더 아팠습니다. 언제쯤 ‘대박’이라는 통일이 이뤄져 통한의 그 아픔들을 삭이게 할 수 있을까요.

  노모를 붙들고 원통하게 울어대던 노인 아들의 눈물, 늙은 아버지를 껴안고 원 없이 울어대는 노인 딸의 한없는 슬픔들이 우리의 가슴에까지 젖어들어 조국의 산하가 울음으로, 눈물로 적셔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별과 상봉, 그리도 또 헤어져야 하는 더 큰 아픔, ‘회자정리(會者定離)’라는 고사성어에 분함을 느끼게 해주었으니, 어찌하여 우리 한민족은 그런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일까요.

  이번 이산가족 상봉에서, 상봉에도 그렇게 많은 ‘상봉’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단체상봉’, ‘개별상봉’, ‘만찬상봉’, ‘작별상봉’ 등의 용어가 계속되어 언론에 보도되었는데, 다시 만날 하등의 예견도 없이 헤어져야 하는 ‘작별상봉’은 참으로 사람의 가슴을 후벼 파는 상봉으로 여겨졌습니다. 남북당국자들, 다른 어떤 일보다도 만나고 또 만나면서 이산의 아픔을 가시게 할 대책을 빨리 강구해야 한다는 결론이 먼저 생각되었습니다. 200여 년 전의 다산 정약용의 일이 생각났습니다. 다산의 문집인 『여유당전서』 제1집인 시문집 21권에는 귀양지에서 다산이 아들에게 보낸 편지가 실려 있습니다. 그 첫 편지의 첫 대목은 이렇습니다. “이별의 회포야 말하지 말자(別懷不須言)”라는 말인데, 1801년 음력 3월 9일 유배지 장기에 도착한 날 썼던 편지입니다. 서울 용산 근처의 ‘돌모루’에서 나이 든 가족들과 헤어지고 한강을 건넌 사평(沙坪:오늘의 반포)에서 처자와 헤어졌던 이별의 그 아픔은 아예 말하지 말자고 했으니, 그 비통함이 오죽했으면 입으로 꺼내지도 말자고 했었겠습니까. 만날 기약도 없는 이별이었으니 그렇다 하겠지만, 강진에서 귀양 살던 때에 아들이 아버지를 만나러 오겠다는 편지를 받고 보낸 답장에는, 만나는 기쁨보다 만나고 나서 또 헤어져야 할 그 이별의 아픔이 예견되어 못 견디겠다는 대목에 가슴이 저려왔습니다.

  “큰 애는 4월 중순에 말을 사서 타고 꼭 오도록 해라. 그런데 헤어질 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마음이 괴롭구나. [伯兒須於四月旬後 買馬騎來 然別懷預關此心耳]” 아버지와 아들 사이, 이런 기막힌 사연이 어디에 또 있을까요. 남북의 이산가족과는 달리, 유배사는 아버지와 고향의 아들이야 영원한 이별이 아니어도 그런 슬픔이 있었는데, 언제 다시 만날 아무런 기약이 없는 이산가족의 ‘작별상봉’이니 슬픔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조국의 분단이 안겨준 민족의 아픔과 고통은 이런 데서 더 명확하게 실감할 수 있습니다.

  여생이 많이 남지 않은 극노인들끼리의 상봉, ‘만찬상봉’이나 ‘개별상봉’도 아닌 ‘작별상봉’은 다산이 헤어짐의 슬픔을 예견했던 것보다 훨씬 그 농도가 깊을 수밖에 없었으니, 그래서 통일은 우리의 간절한 소원이고 꿈에도 소원은 통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남북 분단의 비극보다 아픔의 농도가 낮았을지라도, 다산 개인으로 보았을 때 그들 부자의 상봉과 이별 또한 아프고 쓰리기는 마찬가지, 찾아오는 아들을 만날 기쁨에 앞서 만났다 다시 헤어져야 할 유배살이의 슬픔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슬픔으로 밀려오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