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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단재 신채호

yjh09 2010. 12. 15. 14:26

출생과 성장

신채호는 1880년 12월 8일(음력 11월 7일) 충청남도 대덕군 산내면 어남리 도림마을(현재 행정구역으로는 대전광역시 중구 어남동 233)에서 신광식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신채호는 8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할아버지를 따라 그의 고향인 충청북도 청원군 남성면 귀래리 고두미 마을로 옮겨와 할아버지의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였다. 9세에 자치통감을 배우고, 13세에는 사서삼경을 모두 마칠 수 있었고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삼국지와 수호지를 애독하고 한시를 읊을 정도로 한문실력이 높아졌다.

[편집] 성균관 수학

그의 할아버지는 신채호를 충청남도 목천에 있는 자신의 친구였으며 구한말 관료였던 신기선에게 소개하여 그곳에 있던 장서를 읽게하였다. 신채호은 신기선의 추천을 받아 19세에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그는 서울에 있을 때에 종로의 서점에 나아가 전에는 접하지 못했던 책들을 많이 읽었다.

[편집] 언론 활동

그는 개신유학자들과 함께 독립협회가 주관하는 만민공동회에 참여하였다가 해산될 때에 잠시 체포되었다.

1905년 황성신문의 논설기자로 집필하면서 활동하다가 장지연시일야방성대곡 사건이 일어나자, 황성신문은 통감부에 의해 폐간되고 신채호는 박은식의 도움으로 외국인 베델이 운영하던 대한매일신보로 옮기어 논설기자로 양기탁(梁起鐸)과 함께 집필하였다. 후에 장도빈(張道斌)과 같이 논설을 주도하였다. 1907년에는 안창호가 주도하여 비밀리에 결성한 신민회에 가입하였다. 1910년 4월까지 대한매일신보에서 근무하며 많은 논설을 집필하면서 민족적 각성을 촉구하였다.

[편집] 망명

1910년 4월, 중국으로 망명길에 오르게된다. 그는 먼저 평안북도 정주 오산학교에 들렀다가 만주의 안둥을 거쳐 청도에 이르렀다. 그리고 만주의 독립운동가들과 청도회의를 갖고, 만주 밀산현에 신한민촌을 만들어 ‘독립군기지로 활용하자’는 계획을 세웠다.

1910년 9월, 러시아 제국블라디보스토크 인근에서 신한촌(新韓村)이 형성되자 이에 참여하여 3년간 신민회원들과 독립 운동을 하였다. 바로 이곳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인 성재(誠齋) 이동휘(李東輝 ) 선생을 비롯해 부재(溥齋) 이상설(李相卨), 최재형(崔才亨), 이종호(李鍾浩), 장도빈(張道斌), 홍범도(洪範圖) 등 애국지사들과 조우하고 활동했던 곳이다.[2] 1911년 12월 권업회라는 교민단체를 조직하고 권업신문을 발행하여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다음 해에는 광복회를 만들어 활동하였다. 1913년 권업신문이 재정난으로 어려워지자, 신규식의 초청으로 상해로 떠났다. 상해에서 1년간 머무르며 김규식에게 영어를 배웠다. 1914년 서간도 환인현 홍도천으로가서 1년간 머무르며 집안현의 유적을 답사하였다. 초청한 윤세복의 부탁으로 동창학교에서 국사를 가르쳤는데, 이때 국사 교재로 '조선사'를 집필하였다.

1915년 이회영의 권고로 북경으로 옮겨 1919년3.1 운동이 일어날 때까지 4년간 체류하였다. 북경에서 체류하면서 '중화보'와 '북경일보'에 글을 기고하여 생계를 꾸렸다. 그러면서 조선사통론, 조선사문화편, 사상변천편, 강역고, 인물고 등을 집필하였다.

[편집] 임시정부 참여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북경에서 감격하격하여 상해로가서 4월 '29인 모임'에 참석하여 임시정부를 발기하기 위한 회의인 임시의정원을 4월 11일 개회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의 과거 위임통치청원 전력을 지적하고 그를 반대하였고 8월에 시작한 6회 의정원회의에서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신채호는 '이완용은 있는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없는나라를 팔아먹을려한다.'라고 크게 성토하면서 회의장을 박차고 나가 결별하였다. 1920년 10월 그는 '신대한'이라는 주간신문을 창간하여 임시정부를 맹렬히 비난하였는데,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과, 독립운동의 외교우선론, 노선의 전투성의 미흡, 임시정부의 무능과 파쟁, 여운형의 도일 등이 비판의 이유가 되었다. 이 시기에 신채호는 이승만에게 위임통치청원을 휘하하라는 편지를 두 번이나 보냈으나 답을 받지 못했다.

1920년 '신대한'이 발행이 중단되자, 북경으로 가서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의 중매로 간후회 사건으로 북경에 망명 유학 중이던 28세의 박자혜와 결혼하여 3년간 함께 생활하였는데 1922년 아들과 아내는 귀국할 수 밖에 없었다. 이때 아들 수범이 태어났다. 1921년 1월, 북경에서 독립운동 잡지 월간 '천고'를 창간하였고 김정묵 등과 함께 '통일책진회'를 조직하였다.

1922년 임시정부의 쇄신을 위하여 국민대표회의안이 4월에 가결되었는데, 신채호는 국민대표회의 개최를 적극 지자하였고 가족을 떠나보낸 그는 상해에 와서 의열단 선언 즉 '조선혁명선언'을 작성하고 국민대표회의에도 참석하였다. 1923년 1월, 70개의 독립단체의 대표 123명이 국민대표회의를 갖았는데, 이때 창조파와 개조파가 대립하였다. 신채호는 창조파의 목소리를 크게 하는데 일조하였으며, 창조파는 1923년 6월 7일 새 헌법을 제정하고 창조파의 임시정부를 블라디보스톡으로 옮겨갔다. 그러나 소련정부의 반일활동 금지에 따라 활동이 중지되었고, 신채호는 자유시 참변과 소련이 창조파 임시정부를 불인정하자 공산주의에 대해서 매우 실망하였다.

1923년 창조파 임시정부가 러시아에서 해체되자, 신채호는 실의와 좌절에 빠져 무정부주의와 불교에 관심을 더 깊이 보이게 되었고,북경의 순치문 안에 있는 석등암에서 출가하여 1924년 3월 북경 교외의 관음사에서 61일간의 계를 마치고 정식으로 승려가 되었다. 1925년까지 6개월간 유마경, 능엄경을 연구하였고 마명의 대승기신론을 깊이 연구하였다. 이후 국사연구에 뜻을 더 깊게 두고 연구에 전념하였다.

[편집] 국사연구

그는 국사연구를 위해 북경대학 교수 이석증에게 대학도서관 열람의 편의를 부탁하여 사고전서 등에 출입하며 중국계 역사서적을 읽고 본격적으로 국사연구를 시작하였다. 1922년 중국역사연구법을 쓴 양계초의 역사연구 방법에 영향을 받아 조선상고사를 집필하였다. 1924년 1월 동아일보에 '조선 고래의 문자와 시가의 변천'을 게재하였고, 1924년 10월부터 1925년 3월까지 '상고사 이두문 명사해석법', '삼국사기중 동서양자 상환고증', '삼국지 동이열전 교정', '평양패수고', '전후삼한고' '조선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 등의 글을 발표하였다. 이 논문들은 1930년대에 조선사연구초라는 책으로 묶여졌다. 또한 1925년 시대일보에 '부를 수한 차대왕', '고구려와 신라의 건국년대에 대하여'를 투고하였다.

[편집] 무정부주의 활동

신채호는 1923년 이후에 이회영유자명 그리고 중국인 이석증 교수와 교류하며 무정부주의 사상을 갖게 되었다. 1923년 의열단김원봉이 신채호를 뵙기위해 북경을 방문하고 만나서 '의열단의 정신을 문서화 해달라.'는 요청을 했다. 이에 신채호는 김원봉의 요청에 따라 상해로 와서 폭탄 만드는 시설을 살펴보고, 약 한달 동안 여관방에 앉아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의열단 선언, 즉'조선혁명선언'을 집필했다.

1927년 중국 텐진에서 무정부동맹동방연맹이 조직되었는데 신채호는 이필현과 함께 조선대표로 참가하였다. 같은해 본국에서 좌우합작을 위한 신간회가 조직되자 홍명희안재홍의 권유로 이에도 참여하였다. 이무렵 무정부주의 사상을 담고 있는 '대흑호의 일석담', '용과 용의 대격전' 등의 글을 남겼다.

1928년 4월 그는 북경에서 '무정부주의동방연맹 북경회의'를 조직하였고, 이 회의에서 무정부주의동방연맹의 선전기관을 설립하고 일제의 관공서를 폭파하기 위하여 폭탄제조소를 설립하기로 결의하였다. 5월 8일 잡지발행을 위한 자금을 위한 위조화폐를 가지러 5월 8일 대만의 기륭항에 상륙하다가 체포되어 7개월간 구속되었으며 재판에서는 '나라를 찾기 위하여 취하는 수단은 모두 정당한 것이니 사기가 아니며 민족을 위하여 도둑질을 할지라도 부끄럼이나 거리낌이 없다'고 답변하였다.

[편집] 옥고와 사망

그는 1929년 5월,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10년형의 언도를 받고 뤼순 감옥에 수감되었다. 1935년 그의 건강이 매우 악화되어 형무소 당국은 '보호자가 있으면 출감시키겠다.'고 했으나, 그의 보증인이 친일파라는 이유로 신채호는 가석방을 거절하였다. 그가 수감중에 있을 때, 홍명희는 1924년~1925년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던 글을 모아 1930년 6월에 '조선사연구초'를 출간하였고, 조선일보의 사장 안재홍은 '조선상고사'로 알려진 '조선사'를 1931년 6월부터 103회에 걸쳐 연재하였다. 또한 조선상고문화사도 이어서 연재하였다.

1936년 2월 18일, 그는 뤼순 감옥 독방에서 뇌일혈로 쓰러졌고 사흘 뒤 감방안에서 혼자 있을 때에 사망하여 향년이 57세였다.

[편집] 약력

[편집] 역사관

서울대공원에 있는 동상

일제 강점기의 언론인, 독립운동가로서 국권을 회복하고자 모든 수단을 강구한 민족주의자로, 국사 연구와 교육을 중시하였다. 기존의 왕과 영웅 중심의 전근대적인 사학의 한계를 극복하고, 민중을 중심으로 하는 사학을 내세웠다. 신채호와 박은식을 통해 정립된 민족사관은 일제에 의한 식민사관을 극복하고, 근대적이고 자주적인 주체적 역사관을 확립하는 데 기여하였다. 저서 《조선상고사》에서 특히 역사관을 낭가사상과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으로 보았다.

단재 신채호는 논설, 시, 소설 등에서 역사가 애국심의 원천이라고 주장했다. 애국심을 키우기 위해서는 역사의식을 고취시킴으로써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을지문덕, 최영, 이순신 3대 영웅전을 썼고, 무력의 중요성을 주장했고, 영웅이 나와서 이 나라를 구하는 데에 적극적인 도움을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7]

또, 신채호는 묘청의 난을 조선역사상일천년래제일대사건(一天年來日大事件)이라고 주장했다. 김부식의 사대적이고 중국 의존적 사관으로 인해 조선역사상에서 만주벌판이 역사상에서 사라지게 되었다고 보았으며, 묘청을 자주적이고 진취적인 정신을 가진 정치가이자 승려로 생각했다. 또한, 묘청의 난을 진압한 후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를 사대주의로 점철된 역사서로 강렬하게 비판하기도 하였다.

[편집] 독립운동가

무정부정의자(아나키스트)로 동방 아나키스트 연맹에 참여하였다. 또한 독립을 위해서는 '철저한 비타협적 투쟁과 민중 중심으로 민중을 혁명의 본영'으로 규정하고 테러폭력을 인정하였다. 말년에는 무정부주의자로 활동하였다.

[편집] 소설 창작

꿈하늘》, 《용과 용의 대격전》과 같은 환상적 기법의 우화 소설을 쓰기도 하였다. 소설에는 주로 항일사상을 고취시키는 내용이 담겨 있는 경우가 많다.

출처 : 인초의 방
글쓴이 : 박차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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