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

태어나서...

yjh09 2025. 1. 22. 10:46

태어나서 미안하구나1

나는 잘 살고 있나? 정녕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 걸까? 어느 날 양치질을 하다가, 혹은 횡단보도 앞에서 무연히 서 있다가 울컥 하는 물음과 마주칠 때가 있다. 느른한 권태와 의심에서 솟는 물음에 뒷덜미가 서늘해지는 것이다. 그건 그 물음에 생에 대한 원초적 불안과 두려움이 들어 있는 탓이다. 물음의 이면엔 공회전하는 자기 생에 대한 전면적 회의가 도사리고 있다. 회의는 당연한 것의 당연하지 않음을 자각하는 자에게 주어진다. 돌아보면 인생에서 당연한 것이란 것은 없다. 혹시 있다면 사는 데 약간의 비굴, 수고와 피로가 세금처럼 불가결하게 따라붙는다는 점뿐.

이 세상에 한 생명으로 투기된 순간 인생이란 수레의 바퀴를 굴리며 나아갈 운명에 처한다. 누군가는 망상이 설계한 세계에서 인생을 도모하고, 누군가는 명징한 인식과 야무진 태도로 세상과 마주한다. 젊은 시절 백수로 떠돌았다. 왜 가게 되었는지는 잊었는데, 남쪽 소도시의 역에서 내려 혼자 콩나물국밥을 먹었다. 아침 햇살이 비치는 식당 한 자리에 앉아 국밥 몇 수저를 뜨는데 눈물이 핑 돌았다. 하는 일도 없이 살아서 국밥이나 뜨는 스스로에 대한 연민과 부끄러움이 나를 기습한 탓이다.

햇빛 아래 걷는 게 부끄러워 그늘 아래를 찾아 발걸음을 딛던 시절이다. 물오른 버드나무 가지에도, 졸졸거리는 시냇물에도, 함부로 뒹구는 돌멩이에게도 미안하구나. 부끄러움과 미안함이 상습화하면 그 안에 내재된 순결성이 휘발되고 타성만 단단해진다. 혼자만의 참호에 웅크린 채 시 몇 줄 쓰고 음악으로 도피하곤 했다. 음악에 몰입해 있는 동안은 도취한 듯 내 안에서 들끓던 번민이 죽고 고요해졌다. 그러다가 문득 자기연민 속에서 살아봐야 한다는 기특한 생각 몇 줄기에 매달렸다.

인간은 오래된 동물이다. 나 역시 인간 역사의 유장함 속에서 저마다 세상의 중심이라는 확증편향에 갇힌 채 사는 동물 중 일원이다. 탄광촌 막장 광부의 탄 묻은 검은 얼굴의 비탄도, 매혈로 쥔 돈 몇 푼과 국밥 한 그릇을 맞바꾸는 실업자의 퀭한 눈동자의 절망도, 어느 새벽 사창가 골목에서 제 팔뚝에 마약 주사를 찌르고 허청거리며 사라지던 사내의 병든 허무도 모른 채 모순과 불평등, 온갖 부조리로 굳어진 세상에서 나는 잘도 살았다. 첫 새벽 시내버스를 타고 일터로 나가는 사람들을 보면 나는 부끄러워진다. 쓰레기를 수거하고 배관시설을 고치는 사람들, 우편물을 배달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부끄러워진다. 일용직, 파출부, 간병인, 소방관, 지하철 기관사, 우편배달부들도 제 직분을 성심으로 수행하며 우리 공동체를 돌본다. 이들이 없다면 이 세상은 엉망진창이 될 테다. 이들에게 깊은 존경심과 유대감을 갖는 건 당연하다. 빵을 굽고, 환자를 돌보고, 구두를 닦고, 국밥을 파는 이들이 다 내 부처고 예수이며 참 스승이다.

오랜 동안 1차 생산자들과 견줘 내 글쓰기의 비생산성이 참담했다. 굳은 살 없는 손이 부끄럽고, 된노동을 감당 못하는 부실한 체력이 부끄러웠다. 부끄러움은 자학을 낳고 자학은 절망을 낳는다. 작가 다자이 오사무를 만난 것은 스무 살 무렵이다. 신구문화사판 『전후세계문학선집』에서 「사양(斜陽)」을 읽은 것이다.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유모의 품에서 자랐다. 화류계 여성과 동반 자살 같은 스캔들로 구설수에 오른다. 국가 패망으로 공황에 빠져 방황하는 전후 일본 청년의 추앙을 받으면서도 우울증과 자학, 빈곤에 시달린다. 그는 1948년 『인간실격』을 내놓고 연인과 다마강 수원지에서 투신한다. 나이 39세. 제 부끄러움, 자학, 절망 따위에 등 떠밀려 죽었다.

살아보니, 인생은 쓰디쓴 것도 마냥 달콤한 것도 아니다. 인생이 고해라는 말은 진부하다. 헌데 그 속에 진리가 있다. 인생은 경악할 만큼 짧고 야비할 만큼 슬프다. 태어남을 실수라고 말하는 염세주의자에게 인생이란 공허한 놀음일 테다. 우리는 인생을 배우지 못한 채 태어나 엉금엉금 기다가 어른이 되어 실수와 시행착오를 저지르며 허둥지둥하다가 죽는다. 그런 인생이란 얼마나 덧없고 한심한가! “모든 인생은 망가져가는 과정”이다. 이것은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에세이에 나온 문장이다. 누가 제 인생이 망가지기를 바랄까마는 결국 그걸 피할 수 없는 까닭은 주체의 의도와 세상이 엇갈리는 데서 비롯되었을 테다.

다자이 오사무도, 에밀 시오랑도, 장 폴 사르트르도 죽었다. 지금 살아 있는 우리도 죽는다. 죽음이란 슬픔과 고통으로 얼룩진 삶이 베푸는 마지막 품삯이다. 인간은 그 품삯을 받아들고 세상과 작별한다. 다자이 오사무는 생전에 “죽기ᅠ전에ᅠ온ᅠ힘을ᅠ다해ᅠ땀을ᅠ흘려보고ᅠ싶습니다. 그날그날을ᅠ가득ᅠ채워ᅠ살ᅠ것.”이라고 편지에서 쓴다. 온 힘을 다해 땀 흘리며 하루를 가득 채워 사는 일에 매진하겠다는 다짐은 건강한 의식에서 나왔을 테다. 이걸 자멸파 작가가 썼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라는 말은 명언이다. 과연 다자이 오사무는 인생을 멀리서 보았을까, 가까이에서 보았을까?

삶은 비속하고 야만적이며 부조리한 열정에 지나지 않는 걸까? 아침에 사과 한 알을 우적우적 깨물다가 벼락 치듯 깨닫는다. 참된 인간은 오직 태어나지 않은 존재뿐이라는 걸! 미래의 인류여, 온갖 인간들로 우글거리는 세상에서 나 같이 자조하는 부류도 하나둘은 허용해야 되겠으나, 오, 태어나서 미안하구나! 인생 파산을 남 탓 세상 탓으로 돌리며 살았다면 자학과 자조를 하면서라도 기어이 살아봐야 한다. 성심을 다해 자아라는 탑을 쌓고, 가슴 설레는 내일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대딛어야 한다.

'좋은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카톡으로 아침인사 말  (0) 2024.11.30
친구  (0) 2024.10.07
함께 할 줄 아는 사람  (0) 2024.09.28
가슴에 담아 둘  (0) 2024.09.27
어디쯤 왔을까?  (0) 2024.06.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