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 김용택
(1998년作 시집 '그 여자네 집'[창작과 비평] 수록)
가을이면 은행나무 은행잎이 노랗게 물드는 집
해가 저무는 날 먼 데서도 내 눈에 가장 먼저 뜨이는 집
생각하면 그리웁고
바라보면 정다웠던 집
어디 갔다가 늦게 집에 가는 밤이면
불빛이, 따뜻한 불빛이 검은 산속에 깜박깜박 살아있는 집
그 불빛 아래 앉아 수를 놓으며 앉아 있을
그 여자의 까만 머릿결과 어깨를 생각만 해도
손길이 따뜻해져 오는 집
살구꽃이 피는 집
봄이면 살구꽃이 하얗게 피었다가
꽃잎이 하얗게 담 너머까지 날리는 집
살구꽃 떨어지는 살구나무 아래로
물을 길어오는 그 여자 물동이 속에
꽃잎이 떨어지면 꽃잎이 일으킨 물결처럼 가닿고
싶은 집
샛노란 은행잎이 지고 나면
그 여자
아버지와 그 여자
큰 오빠가
지붕에 올라가
하루 종일 노랗게 지붕을 이는 집
노란 초가집
어쩌다가 열린 대문 사이로 그 여자네 집 마당이 보이고
그 여자가 마당을 왔다 갔다 하며
무슨 일이 있는지 무슨 말인가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소리와
옷자락이 대문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면
그 마당에 들어가 나도 그 일에 참견하고 싶었던 집
마당에 햇살이 노란 집
저녁연기가 곧게 올라가는 집
뒤안에 감이 붉게 익는 집
참새떼가 지저귀는 집
보리타작, 콩타작 도리깨가 지붕 위로 보이는 집
눈 오는 집
아침 눈이 하얗게 처마끝을 지나
마당에 내리고
그 여자가 몸을 웅숭그리고
아직 쓸지 않은 마당을 지나
뒤안으로 김치를 내러 가다가
"하따, 눈이 참말로 이쁘게도 온다이이"하며
눈이 가득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다가
싱그러운 이마와 검은 속눈썹에 걸린 눈을 털며
김칫독을 열 때
하얀 눈송이들이 어두운 김칫독 안으로
하얗게 내리는 집
김칫독 엎드린 그 여자의 등에
하얀 눈송이들이 어두운 김칫독 안으로
하얗게 내리는 집
내가 함박눈이 되어 내리고 싶은 집
밤을 새워, 몇 밤을 새워 눈이 내리고
아무도 오가는 이 없는 늦은 밤
그 여자의 방에서만 따뜻한 불빛이 새어 나오면
발자국을 숨기며 그 여자네 집 마당을 지나 그 여자의 방
앞 뜰 방에 서서 그 여자의 눈 맞은 신을 보며
머리에, 어깨에 쌓인 눈을 털고
가만가만 내리는 눈송이들도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가만 가만히 그 여자를 부르고 싶은 집
그
여
자
네 집
어느 날인가
그 어느 날인가 못밤을 머리에 이고 가다가 나와 딱
마주쳤을 때
어머나, 깜짝 놀라며 뚝 멈추어 서서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며 반가움을 하나도 감추지 않고
환하게, 들판에 고봉으로 담아놓은 쌀밥같이
화아안하게 하얀 이를 다 드러내며 웃던 그
여자 함박꽃 같던 그
여자
그 여자가 꽃 같은 열아홉 살까지 살던 집
우리 동네 바로 윗동네 가운데 고샅 첫 집
내가 밖에서 집으로 갈 때
차에서 내리면 제일 먼저 눈길이 가는 집
그 집 앞을 다 지나도록 그 여자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저절로 발걸음이 느려지는 그 여자네 집
지금은 아,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집
내 마음속에 지어진 집
눈 감으면 살구꽃이 바람에 하얗게 날리는 집
눈 내리고, 아, 눈이, 살구나무 실가지 사이로
목화송이 같은 눈이 사흘이나
내리던 집
그 여자네 집
언제나 그 어느 때나
내 마음이 먼저
가
있던 집
그
여자네
집
생각하면,
생
각
하
면,
생, 각, 을, 하, 면 ……
….
///
감상
모든 시 속에는 항상 시인의 체험과 기억이 있다.
김용택의 <그 여자네 집>도 그렇다.
깊은 밤 돌아오던 귀갓길로 가장 먼저 눈길이 닿던 그 여자네 집,
그와 함께 했던, 은행나뭇잎 정다운 지저귐이 있던 가을날,
함께 그 여자 가족들과 지붕을 이며 설레었던 봄날,
저녁 향기와 함께 첫사랑처럼 피어나던 여름날,
소복이 쌓이는 하얀 눈 사이로 밝아오던 하얀 미소, 그 겨울날.
이 모든 시인의 체험들은 시상이 되어 시어들에 녹아있다.
그리고 그 소중한 감정들은
소박한 단어들 속에서 달콤한 목소리로 되살아난다.
이 한 편의 시 속에는 출렁이는 삶이 있다.
그 삶은 과거의 사건들이 녹화된 비디오를 재생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생생히 눈앞에서 펼쳐지는 현재의 사건들로 현상된다.
그리고 그 속을 온통 채우고 있는 그 여자,
이 자칫 격정적으로 치솟을 수도 있는 이야기를
시인은 담백하게, 그리고 절제된 어조 속에서 읊조린다.
그날의 추억들, 풍경들, 기억들은
하나의 채색된 풍경화가 되어
읽는 이로 하여금 내적 승화를 불러온다.
생각하면 그리웁고, 바라보면 정답던
그 시절 우리들의 이야기를 간질인다.
우리들의 첫사랑을 떠올린다.
소중했던 한 사람을
이처럼 아름다운 목소리로 기록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시인이 사랑했던 그 여자는 앞으로도 영원히
이 시 속에서 밝게 빛날 것이다.
한 사람에 대한, 그리고 그 한 사람을 사랑했던
사람에 대한 아름다운 이야기,
매번 느끼지만 정말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시, <그 여자네 집>
배경음악 - 크리스마스 풍경 (피아노 포엠)
<부가 설명>
1998년 창작과 비평사에서 발행된 박완서의 소설집 『너무도 쓸쓸한 당신』에 수록된 단편소설에는
동명의 소설 「그 여자네 집」이 있다.
작가인 주인공 ‘나’의 서술로 이루어져 있는 이 소설은 김용택 시인의 동명의 시를 도입부에 소개하고 있다.
‘나’는 북한 동포 돕기 시 낭송회에서 「그 여자네 집」을 낭송하게 되었는데,
이 시는 화자가 과거를 회상할 수 있는 매개체로 작용하고 있다.
이러한 도입을 통해 ‘나’는 과거 고향 마을의 곱단이와 만득이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그 여자네 집 (한국현대문학대사전, 2004. 2. 25.)
<시인에 대하여>
김용택
김용택은 부박한 모더니즘에 휩싸이지 않고, 이념에 얽매이지 않으면서도 언어적 절제를 지키면서 아름다운 시로써 독자들을 감동시킨 시인으로 평가된다. 전북 임실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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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택
섬진강을 배경으로 한 작품을 많이 한 시인. 대상일 뿐인 자연을 삶의 한복판으로 끌어들여 절제된 언어로 형상화한 그는 김소월과 백석을 잇는 시인으로 평가된다. 주요 작품으로 《섬진강》, 《사람들은...
[좋은시] 김용택 - 그 여자네 집
2014. 12. 13.
(1998년作 시집 '그 여자네 집'[창작과 비평] 수록)
가을이면 은행나무 은행잎이 노랗게 물드는 집
해가 저무는 날 먼 데서도 내 눈에 가장 먼저 뜨이는 집
생각하면 그리웁고
바라보면 정다웠던 집
어디 갔다가 늦게 집에 가는 밤이면
불빛이, 따뜻한 불빛이 검은 산속에 깜박깜박 살아있는 집
그 불빛 아래 앉아 수를 놓으며 앉아 있을
그 여자의 까만 머릿결과 어깨를 생각만 해도
손길이 따뜻해져 오는 집
살구꽃이 피는 집
봄이면 살구꽃이 하얗게 피었다가
꽃잎이 하얗게 담 너머까지 날리는 집
살구꽃 떨어지는 살구나무 아래로
물을 길어오는 그 여자 물동이 속에
꽃잎이 떨어지면 꽃잎이 일으킨 물결처럼 가닿고
싶은 집
샛노란 은행잎이 지고 나면
그 여자
아버지와 그 여자
큰 오빠가
지붕에 올라가
하루 종일 노랗게 지붕을 이는 집
노란 초가집
어쩌다가 열린 대문 사이로 그 여자네 집 마당이 보이고
그 여자가 마당을 왔다 갔다 하며
무슨 일이 있는지 무슨 말인가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소리와
옷자락이 대문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면
그 마당에 들어가 나도 그 일에 참견하고 싶었던 집
마당에 햇살이 노란 집
저녁연기가 곧게 올라가는 집
뒤안에 감이 붉게 익는 집
참새떼가 지저귀는 집
보리타작, 콩타작 도리깨가 지붕 위로 보이는 집
눈 오는 집
아침 눈이 하얗게 처마끝을 지나
마당에 내리고
그 여자가 몸을 웅숭그리고
아직 쓸지 않은 마당을 지나
뒤안으로 김치를 내러 가다가
"하따, 눈이 참말로 이쁘게도 온다이이"하며
눈이 가득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다가
싱그러운 이마와 검은 속눈썹에 걸린 눈을 털며
김칫독을 열 때
하얀 눈송이들이 어두운 김칫독 안으로
하얗게 내리는 집
김칫독 엎드린 그 여자의 등에
하얀 눈송이들이 어두운 김칫독 안으로
하얗게 내리는 집
내가 함박눈이 되어 내리고 싶은 집
밤을 새워, 몇 밤을 새워 눈이 내리고
아무도 오가는 이 없는 늦은 밤
그 여자의 방에서만 따뜻한 불빛이 새어 나오면
발자국을 숨기며 그 여자네 집 마당을 지나 그 여자의 방
앞 뜰 방에 서서 그 여자의 눈 맞은 신을 보며
머리에, 어깨에 쌓인 눈을 털고
가만가만 내리는 눈송이들도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가만 가만히 그 여자를 부르고 싶은 집
그
여
자
네 집
어느 날인가
그 어느 날인가 못밤을 머리에 이고 가다가 나와 딱
마주쳤을 때
어머나, 깜짝 놀라며 뚝 멈추어 서서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며 반가움을 하나도 감추지 않고
환하게, 들판에 고봉으로 담아놓은 쌀밥같이
화아안하게 하얀 이를 다 드러내며 웃던 그
여자 함박꽃 같던 그
여자
그 여자가 꽃 같은 열아홉 살까지 살던 집
우리 동네 바로 윗동네 가운데 고샅 첫 집
내가 밖에서 집으로 갈 때
차에서 내리면 제일 먼저 눈길이 가는 집
그 집 앞을 다 지나도록 그 여자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저절로 발걸음이 느려지는 그 여자네 집
지금은 아,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집
내 마음속에 지어진 집
눈 감으면 살구꽃이 바람에 하얗게 날리는 집
눈 내리고, 아, 눈이, 살구나무 실가지 사이로
목화송이 같은 눈이 사흘이나
내리던 집
그 여자네 집
언제나 그 어느 때나
내 마음이 먼저
가
있던 집
그
여자네
집
생각하면,
생
각
하
면,
생, 각, 을, 하, 면 ……
….
///
감상
모든 시 속에는 항상 시인의 체험과 기억이 있다.
김용택의 <그 여자네 집>도 그렇다.
깊은 밤 돌아오던 귀갓길로 가장 먼저 눈길이 닿던 그 여자네 집,
그와 함께 했던, 은행나뭇잎 정다운 지저귐이 있던 가을날,
함께 그 여자 가족들과 지붕을 이며 설레었던 봄날,
저녁 향기와 함께 첫사랑처럼 피어나던 여름날,
소복이 쌓이는 하얀 눈 사이로 밝아오던 하얀 미소, 그 겨울날.
이 모든 시인의 체험들은 시상이 되어 시어들에 녹아있다.
그리고 그 소중한 감정들은
소박한 단어들 속에서 달콤한 목소리로 되살아난다.
이 한 편의 시 속에는 출렁이는 삶이 있다.
그 삶은 과거의 사건들이 녹화된 비디오를 재생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생생히 눈앞에서 펼쳐지는 현재의 사건들로 현상된다.
그리고 그 속을 온통 채우고 있는 그 여자,
이 자칫 격정적으로 치솟을 수도 있는 이야기를
시인은 담백하게, 그리고 절제된 어조 속에서 읊조린다.
그날의 추억들, 풍경들, 기억들은
하나의 채색된 풍경화가 되어
읽는 이로 하여금 내적 승화를 불러온다.
생각하면 그리웁고, 바라보면 정답던
그 시절 우리들의 이야기를 간질인다.
우리들의 첫사랑을 떠올린다.
소중했던 한 사람을
이처럼 아름다운 목소리로 기록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시인이 사랑했던 그 여자는 앞으로도 영원히
이 시 속에서 밝게 빛날 것이다.
한 사람에 대한, 그리고 그 한 사람을 사랑했던
사람에 대한 아름다운 이야기,
매번 느끼지만 정말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시, <그 여자네 집>
배경음악 - 크리스마스 풍경 (피아노 포엠)
<부가 설명>
1998년 창작과 비평사에서 발행된 박완서의 소설집 『너무도 쓸쓸한 당신』에 수록된 단편소설에는
동명의 소설 「그 여자네 집」이 있다.
작가인 주인공 ‘나’의 서술로 이루어져 있는 이 소설은 김용택 시인의 동명의 시를 도입부에 소개하고 있다.
‘나’는 북한 동포 돕기 시 낭송회에서 「그 여자네 집」을 낭송하게 되었는데,
이 시는 화자가 과거를 회상할 수 있는 매개체로 작용하고 있다.
이러한 도입을 통해 ‘나’는 과거 고향 마을의 곱단이와 만득이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그 여자네 집 (한국현대문학대사전, 2004. 2. 25.)
<시인에 대하여>
김용택
김용택은 부박한 모더니즘에 휩싸이지 않고, 이념에 얽매이지 않으면서도 언어적 절제를 지키면서 아름다운 시로써 독자들을 감동시킨 시인으로 평가된다. 전북 임실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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