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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친 王

yjh09 2024. 9. 10. 06:46

도망친 왕, 포획된 왕

김 태 희 (역사연구자)
어느 사석에서 임진전쟁 때 선조의 도망에 대해 두둔하는 발언을 했다가 냉랭한 분위기에 직면했다. 어찌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는 반응이었다. 필자는 인조와 고종의 사례로 응답했다. 인조는 제때 도망치지 못해서 효과적인 방어전략을 실행할 수 없었고, 고종은 아예 도망도 가지 못한 채 일본군에 사로잡힌 신세가 되어 심대한 해를 끼쳤다.

임진년(1592년), 선조는 어두운 새벽 쏟아지는 빗속에 왕궁을 탈출했다(4월 30일). 일본군의 북상 속도만큼이나 선조의 도망 속도도 빨랐다. 개성을 지나 평양에서 머물렀는데, 일본군이 대동강변에 이르자 선조는 또 평양을 떠났다. 민심이 흉흉했지만, 선조의 도망길을 막지 못했다.

선조는 피난길에 오르면서 이미 중국으로 도망칠 궁리를 했다. 의주를 거쳐 압록강을 건너는 것이었다. 신하들은 반대했다. 이때 묘수가 나왔다. 이른바 분조(分朝), 조정을 둘로 나누는 것이다. 급하게 책봉한 세자(광해군)에게 민심을 수습하고 저항을 독려하는 임무를 맡겨 함경도로 보냈다. 선조는 의주로 도망쳤다. 의주에 도착해 명의 답변을 기다렸지만, 명은 월경을 거절했다(김영진, 『임진왜란』 참조).

역사는 판단력과 상상력의 요긴한 자료

광해군은 큰 활약을 했지만, 다른 두 왕자는 방자하게 굴다가 일본군 포로로 넘겨져 협상거리가 되었다. 만약 국왕이 일본군에게 포획되었다면 얼마나 큰 민폐를 끼쳤을까. 국왕의 안전은 중요했다.

병자년(1636년), 청나라를 오랑캐라며 깔보고 큰소리치던 조선은 이제 청과의 전쟁을 대비해야 했다. 과거의 역사는 판단력과 상상력의 요긴한 자료가 된다. 조선은 약 10년 전 정묘호란의 경험을 살려 대비했다. 핵심은 그때처럼 강화도에 지휘부를 옮겨서 지구전을 펴는 것이었다. 산성을 강화하여 청의 진격을 막고 그동안 사나흘이면 국왕이 강화도로 도망갈 수 있었다.

과거의 경험에서 배우는 것은 청이 한 수 위였다. 청 태종 홍타이지는 300명 가량의 정예병을 선발대로 편성하여 특명을 내렸다. “상인으로 가장하여 밤낮없이 달려가 조선의 왕이 사는 왕경 성을 포위하라.”(구범진,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 참조) 신속한 기병부대가 선발대를 뒤따르고, 그 뒤에 본진이 남하했다. 한겨울이라 얼어붙은 강을 쉽게 건넜다. 청군은 조선군의 방어 거점인 산성을 지나쳐 전속력으로 서울로 향했다.

청군의 남하를 알리는 보고가 속속 서울에 도착하는데, 그 속도가 가공할 만했다. 어느새 서울 북쪽 홍제원 부근에 청병이 출현했다. 좀 머뭇거렸던 인조는 다급해졌다. 강화도로 가지 못하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남한산성을 포위한 청군은 다른 한편으로 강화도를 함락해버렸다. 남한산성의 방어력이 소진되자, 인조는 산성을 나와 치욕적인 항복의 예를 올려야 했다. 만약 인조가 예정대로 강화도로 도망갔다면 전쟁은 어찌 되었을까.

인조는 포위되고, 고종은 포획되어

갑오년(1894년), 동학농민군의 진압을 위한 군사 파견을 요청받은 청나라는 ‘엉거주춤’ 출병했다. 반면 일본군은 전쟁 기회를 놓칠까 안달이었다. 임오군란 때 청군에게 열세였지만, 10여년 동안 군사력 증강에 매진했다. 혼성 제9여단의 오시마 요시마사 여단장은 ‘300년 전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후의 쾌거’라며 고무되어 일본을 출발했다(와타나베 노부유키(이규수 역),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진실』 참조).

8천 명 정도의 혼성여단 총병력이 용산에 집결했다. 청과의 전쟁에 앞서 조선의 왕궁을 무력으로 점령하는 군사작전이 계획되었다. 청에 의탁하는 조선 국왕(고종)을 수중에 넣는 것이 목표였다. 6월 21일(양력 7월 23일) 자정을 넘기자, 일본군은 공병부대를 동원하여 서쪽 영추문을 파괴하고 경복궁에 침입했다. 산발적인 군사적 저항을 제압하고 고종을 호위하는 병사들도 무장해제시켰다.

경복궁 무력 점령에 경악한 동학농민군은 다시 봉기했고, 일본군과 결전을 벌였지만 패했다. 이듬해 일본은 왕후마저 시해하여 고종은 극심한 고립상태가 되었다. 마침내 자신의 왕궁을 탈출했다. 자국 백성을 진압하고자 외국(청) 군대를 불러들인 국왕이, 다른 외국(일) 군대에게 사로잡힌 신세로 있다가, 도망친 곳은 또다른 외국(러) 공사관이었다. 국왕의 무능과 부패로 인해 백성이 입은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요즘 정부의 행태에 어안이 벙벙하다. 안보 담당자가 외국에게 도청을 당하고도 문제가 없다고 말한다. 전쟁국가 부활을 꾀하는 일본의 요구에 부응하면서, 국권 회복을 위해 평생을 바쳤던 독립운동가는 모욕한다. ‘일본의 마음’을 헤아리면서, 우리 국민의 마음은 무시한다. 도대체 어느 나라 관리인가, 무엇에 포획되었는가. 일본이 조선(한국)을 병탄한 역사를 다시 돌아보지 않을 수 없는 요즘이다.

글쓴이 / 김 태 희
- 다산연구소 대표
- (전) 실학박물관장

[저서]
〈실학의 숲에서 오늘을 보다〉(빈빈책방, 2021)
〈실사구시 제창자 양득중〉(공저)(경인문화사, 2021)
〈정약용의 삶과 글〉(실학박물관, 2019)
〈반계 유형원과 동아시아 실학사상〉(공저)(학자원, 2018)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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