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사마천은 『사기』첫머리에 백이열전을 실었을까? 

yjh09 2015. 1. 11. 14:07

사마천은 『사기』첫머리에 백이열전을 실었을까? 

 

내가 존경하는 인물 중에서 우리 나라 현대사에 몇 안되는 진정한 지식인으로 김준엽을 들 수 있다. 향년 91세로 천수를 다한 셈이지만 격동의 오랜 세월을 살면서 학자로서 선비로서 고결하게 살다간 삶이 후예들에게 커다른 교훈을 남겨 주었다. 언젠가 그 분의 삶의 역정을 접하고 진심으로 존경하게 되었다. 80년대 대학 재학시에 고려대학교 학생 처장으로 시위를 마치고 돌아오는 고려대학생들을 위해 라면을 끓여주었다는 확인되지 않은 말을 선배들로부터 김준엽 박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훗날 국무총리로 몇 번이나 권유받았지만 결국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는 일제 시대 일본 게이오대학 유학 시절인 1944년 1월 선생은 일본군의 학병으로 징집돼 중국전선에 배치되었지만 한 달 만에 장준하 선생 등과 함께 일본군을 탈출, 6000리 길을 걸어 중국 충칭으로 가 광복군에 합류하게 된다. 당시 중국 전선에서 일본군 탈출은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위험천만한 것이었으며, 일본군 탈출은 선생의 용기와 애국심이 돋보이는 사건이었다.

 

김준엽은 80년대 전두환 정권 하에서의 반독재 투쟁에서 지식인으로 드물게 처신한다. 당시 고려대 총장이면서 민주화 운동으로 강제해직된 교수들을 복직시켰으며, 나아가 민주화 투쟁을 벌이던 학생들에 대한 처벌을 거부하였다. 실제로 당시 대다수의 대학 총장들은 정권에 빌붙어 동료 교수들을 자르거나 학생들을 감옥으로 내몰기가 일쑤였다. 

이런 사정을 알던 당시 고대 학생들은 총장실 창 너머 길가에 모여서 ‘광복군가’를 불렀으며, 나중에 선생이 정권의 압력을 받아 사임하려고 하자 학생들이 나서서 ‘김준엽 총장 퇴진 반대운동’을 펼치기도 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김준엽은 광복군으로서 독립 투쟁한 경력에 뛰어난 학자였기 때문에 박정희 정권에서부터 김대중 정권까지 무려 12차례에 걸쳐 국무총리 자리를 제의 받았으나 번번이 이를 거절하였다. 총리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로 누구나 탐내는 자리였기 때문에 쉽지 않은 처신이었다. 이와 관련해 김준엽은 생전에 “우리사회에 나 한 사람쯤이라도 벼슬자리에 연연해하지 않고 후학의 존경을 받는 원로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담담하게 말한 적이 있다.

 

현대 사회에서 대학교수 출신들이 줄줄이 권력의 품에 안기고 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상당수가 도덕성이니 전문성 측면에서 자격미달이다. 이는 국회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백일하에 드러난 바 있는데, 구체적인 사례로는 위장 전입·부동산 투기·세금 탈루·병역 기피·논문 중복게재 및 조작 등이다. 이들 가운데는 ‘3관왕’, ‘4관왕’을 하고서도 진솔한 사죄는커녕 오히려 해명을 빌미로 뻔뻔스런 변명을 늘어놓고 있으니 참으로 후안무치한 사람들이 아닐 수 없다. 물론 교수 출신들의 정권 참여를 무조건 비난할 일만은 아니다. 문제는 평소 권력자에게 꼬리를 치다가 기회가 되면 앞뒤 안가리고 권력의 앞잡이나 시녀노릇을 하는 행태이다.

 

오늘날 그 존재 여부조차 의심받고 있는 ‘창백한 정신의 귀족’백이와 숙제를 열 번의 첫머리에 올린 사마천의 의도는 의미심장하다. 권력과 이익을 위해 절대 다수의 백성을 희생시키는 현실 정치와는 너무도 뚜렷한 대조를 이루는 두 형제의 왕위 ‘양보’를 부각시키고, 사람을 기만하는‘천도’와 ‘미신’을 강렬히 부정하면서 자신의 불우한 처지를 투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사마천 역시 ‘기인’의 반열에 오르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춘 인물이 아닐까 싶다.

 

사마천은 사기 열전 70편을 전개하면서 백이와 숙제 형제 편을 가장 먼저 언급하고 있다. 사기 열전을 읽으면서 궁금증이 더했다. 왜 사마천은 어쩌면 평범한 왕자들의 이야기를, 그것도 시대에 영웅적인 기질이 전혀 보이지 않는 인물들을 제시하면서 거대한 역사서를 구성하게 되었을까. 백이와 숙제는 상나라 고죽국 군주의 두 아들로, 아버지가 아우인 숙제에게 왕위를 잇게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아버지가 죽자 숙제는 왕위를 거부하고 형 백이에게 양보하였다. 그러자 백이도 아버지의 뜻을 고려하여 다른 나라로 떠났고, 숙제로 왕위를 거부하여 나라 사람들이 둘째 왕자를 왕으로 세웠다. 

 

백이와 숙제는 서백창(주나라 문왕)의 노인을 잘 보살핀다는 소리를 듣고 의탁하기 위해 주나라를 찾았으나 이미 문왕은 죽고 그 아들 무왕이 아버지의 위패를 수레에 걸고 상나라의 폭군 주왕을 공격하려고 동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백이와 숙제는 신하가 군왕을 시해하는 것은 인(仁)이 아니라고 말렸지만 무왕은 주왕의 폭정을 빌미로 주나라를 멸망시키고 주나라를 건국하게 된다. 이 소식을 듣고 백이와 숙제는 주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고, 절의를 지키고자 주나라 곡식을 거부하고 수양산에 은거하다가 굶어 죽고 말았다. 

 

사마천은 「백이열전」이 전체 70편을 대표하는 역할을 부여하여, 사기 열전 첫 번째에 배치하였다. 『사기』를 지은 목적과 사관으로서 책임감을 드러내고 있다. 사마천은 ‘재산을 탐내는 자는 재물 때문에 죽고, 삶보다 의를 중시하는 자는 이름에 목숨을 바치고, 이름과 권세를 좋아하는 사람은 권세를 추구하다 몸을 망치며, 평범하게 사는 보통 사람들은 하루 하루를 연명하게 된다’고 생각했다. 그 당시나 지금이나 백이와 숙제와 같이 절개를 지키려는 사람이 귀한 현실에서 쉽지 않은 처신을 한 것에 주목하였다. 사마천이 이 점에 주목하지 않았을까. 권세에 눈이 멀어 백성의 시선은 안중에 두지 않고 오직 권력자만 바라보면서 부귀를 탐하고 가렴주구를 일삼다 결국 패가망신하는 사람들에 대한 경고의 성격은 없었을까. 

 

어떤 이는 말하기를, 하늘의 도는 공평하여 늘 착한 사람의 편에 있다고 한다. 백이와 숙제는 어짊을 쌓고 행동을 깨끗하게 하였으니 착한 사람이 분명하다. 그런데 하늘은 어찌하여 두 사람을 굶어 죽게 한 것인가? 공자는 70명의 제자 가운데서 안연(顔淵)만이 학문을 좋아한다고 칭찬했다. 그러나 그는 끼는 자주 걸렀으며 술지게미나 겨밥 같은 거친 음식조차도 배불리 먹지 못하고 결국 젊은 나이에 죽고 말았다. 하늘이 착한 사람에게 복을 준다면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이에 반해 춘추시대 말기의 도적이 도척(盜蹠)은 어떤가? 그는 날마다 죄 없는 사람을 죽이고, 사람의 생간을 회쳐 먹은 포악한 인물이었다. 이 악랄한 도척은 수천 명의 무리를 이끌고 천하를 제멋대로 돌아다니며 말로 할 수 없는 못된 짓을 다하였으나, 천벌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장수하였으니 이는 그에게 과연 덕행(德行)이 있어서인가?

 

요즘 세상의 일을 보면 참으로 이해하기가 어려운 점이 많다. 어떤 사람은 남에게 온갖 악행을 일삼으면서도 대를 이어 부귀영화를 누리는가 하면, 땅을 가려서 딛고, 적합한 때를 기다려서 말을 하며, 큰 길이 아니면 다니지를 않고, 공정한 일이 아니면 나서지를 않는데도 환난과 재앙을 만나는 사람이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이런 것이 하늘의 도, 즉 천도라고 한다면 그 천도는 과연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

사마천은 고결한 현자들이 역사에서 사라진다면 너무나 안타깝다고 생각하여, 절개가 있고 덕망을 쌓은 현인들이 자신의 역사서를 통해 후세에 길이 전해져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졌다. 열전 70 편의 마지막 편인 「태사공자서」와 서로 호응을 이룬다. 공자는 말한다. ‘사람은 각기 실천의 도가 갖지 않으면 서로 꾀하는 바도 다르다.’,‘날씨가 추워져야 비로소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산중에 은거하는 선비는 일정한 때를 보아 세상에 나아가기도 하고 물러나기도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람들의 이름이 그대로 사라지고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는 경우가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시골에 묻혀 사는 사람이 덕행을 가다듬어 세상에 이름을 알리려 해도 공자와 같은 성현의 덕으로 칭송되지 않는다면 후세에 그 이름이 전해질 수 없다. 백이와 숙제는 현인지만, 공자의 붓으로 인하여 그 이름이 점차 드러났고, 안연은 학문에 충실하였지만 파리가 천리마의 꼬리에 붙어 천리를 갈 수 있는 것처럼 공자의 기미에 붙음으로써 그 품행이 더욱 나타나게 되었다. 

 

진정으로 『사기』의 천도관을 정면에서 뒤흔드는 것은 「백이열전」의 내용이다. 여기서 사마천은 천도에 대해 회의적이 사상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데, 이러한 사상은 사마천 자신의 뼈아픈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며 피로서 얻은 것이다. 사마천은 한왕조가 천명을 얻어 왕조를 세웠다는 것을 진정으로 믿고 하나의 위대한 왕도정치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보았다. 또 자신이 500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행운을 한몸에 안았다고 굳게 믿으면서 제2의 공자가 되겠다는 뜻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는 모든 빈객을 사절하고 한마음 한뜻으로 자신의 직책에 충실하면서 천자의 총애를 받으려고 애썼다. 이릉을 위해 변명한 것도 한무제를 위로하려는 충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선행은 보답으로 이어지기는커녕 오히려 궁형이라는 참형을 당하게 되며 상상하기 어려운 굴욕과 고통을 겪게 되었다. 이러한 피의 교훈은 사마천의 천명관에 큰 충격으로 다가왔고 그로 하여금 천도가 선한 자에게 상을 주고 악한 자에게 벌을 내린다는 전통적인 신념에 대해 회의를 느끼게 하였다.

 

오랫동안 마음 속에 쌓였던 회의와 고민의 정서는, 백이와 숙제가 인덕을 쌓고 선행을 하였지만 결국 굶어 죽어간 사실을 서술하면서 걷잡을 수 없이 분출되었다. 사마천은 백이의 참사에서 자신의 비참한 모습을 보았고, 나아가 역사와 현실에서 선악과 인과응보가 전도된 무수한 사례들을 연상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는 ‘하늘에 따지려는’(問天)강렬한 충동이 생겼고, 이성의 광명이 천명사상이라는 먹구름을 뚫고 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지적해야 할 것은 『백이열전』의 내용은 단지 천도에 대한 회의에 그쳤을 뿐, 『사기』천도관의 전체적 체계를 극복하지는 못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상은 『사기』에서 잠깐 등장했을 뿐 더 이상의 발전이 없었으며, 천인감응의 우주관은 『사기』에서 여전히 굳건한 위치를 고수하고 있었다. 

 

사마천은 『사기』열전의 첫 권을 ‘정신의 귀족’을 대변하는 백이와 숙제의 이야기로 출발한다. 그리고 『자서』를 제외한 『사기』130권의 마지막 권인 129권을 ‘현실의 귀족’이라 할 수 있는 장사꾼들의 이야기인 『화식열전』으로 마무리하는 절묘한 안배를 보여준다. 우리는 이 둘을 대비하며 인간과 인생에 대한 심오한 철리를 터득함과 동시에 유익한 균형감각을 얻게 된다. 태어날 때 하늘이 세 번이나 물었다고 해서 이름도 삼문(三問)으로 지은 매죽헌 성삼문은 수양이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를 찬탈하자 통분의 시조를 지었다.

“수양산 바라보며 백이숙제 한탄하노라 / 주려 죽을진정 고사리는 어디에 난 것인가 / 아무리 푸새엣 것인들 그 뉘 땅에 났더니”

고사리도 주나라 땅에 난 것이니 그것을 따먹다 굶어 죽었다고 백이숙제가 훌륭하진 않다는 단죄이다. 주무왕의 말고삐를 돌리지 못했다면 그 자리에서 목에 칼을 물고 자진했어야 했다는 주장이니, 선비란 참으로 칼날 위에 사는 존재들이다. 이 시조에는 숙종 때 남곡 주의식이 지은 댓귀가 있다.

“굶주려 죽으려고 수양산에 들렸거니/ 설마 고사리를 먹으려고 캤으리오 / 본래에 구부러져서 펴주려고 캔 것이네”

처음엔 궁벽한 변명이거니 했는데, 나이가 들면서 이 시조가 새롭다. 목숨을 초개처럼 버리면서 지켜야 할 절조도 좋거니와, 굽은 것을 펴보려고 캐본다는 마음도 곧다. 매죽헌의 호통으론 간담이 서늘한데, 남곡의 은유도 폐부에 새길 일이다.

백이 숙제에겐 명분에 빠져 혁명을 도외시했다는 폐단이 있다. 공부자께서 꿈에서도 만나고 싶었던 주공의 나라, 주나라가 과연 그렇게 무도하고 불의한 나라였던가. 신하로써 주군을 칠 수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무도한 은나라 주왕을 토벌할 수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맹자의 역성혁명론은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을까. 그래서 나는 백이 숙제가 굶주려 죽어간 자취에서 미생의 어리석은 신의를 읽는다. 명분에 빠져 시대를 잊는다면, 절개는 가상하되 기릴 것까지는 없다.

그러나 수양의 왕위찬탈 앞에 죽음으로써 항거한 성삼문의 절개는 백이 숙제의 그것과는 또 다르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변할 수 없는 원칙을 지키고자 하는 인간의 높은 품격 자체라 할 것이다.

 

백이 숙제조차 대수롭지 않게 여긴 성삼문의 절개는 만고에 푸르리라. 그러나 굽은 것을 펴보려고 고사리를 캤다는 남곡의 은유에도 새길 바가 있다. 절개를 훼손하여 자신의 영달에 힘썼다면 간신배이지만, 노선을 바꿨어도 몸과 뜻이 국민을 섬겼다면 어찌 봐야 할까. 세종의 총애를 받다 수양을 따라가 후대에 숙주나물의 오명을 썼지만, 신숙주의 삶과 공적을 그냥 변절, 한마디로 패대기쳐 버린다면 원칙과 현실 사이에서 고민이 없는 것이다.

'문학산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목로주점 = 에밀 졸라  (0) 2015.01.19
흔들리며 피는 꽃  (0) 2015.01.14
징비록  (0) 2015.01.07
관우의 죽음 vs 제갈량의 죽음  (0) 2014.12.31
또 한 해의 행복을 꿈꾸며 / 이 채 시인  (0) 2014.1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