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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2세

yjh09 2026. 4. 4.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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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인물로 본 세계사
아버지 처형 보고 9년 망명 뒤 복위한 찰스 2세
기자명 김성수 시민기자   입력 2026.04.03 07:35  수정 2026.04.03 08:07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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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단두대, 아들은 침대에서 죽음

"여러분이 오래 기다리게 해 미안합니다"

쿠데타 세력을 오히려 포용하는 처세술

프랑스 루이 14세 뒷돈 받고 정책 흥정

사생아 14명을 두고도 왕립학회는 챙겨

국가가 지식과 연구 제도로 뒷받침하면

사회 전체가 어떻게 발전하는지 보여줘
복위(復位)의 기적, 아니면 처세의 승리?

1649년 1월 30일, 영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사건이 벌어졌다. 왕이 단두대에서 목이 잘렸다. 피고인은 찰스 1세(1600~1649). 죄목은 '국민의 적'이었다. 그 장면을 열아홉 살의 눈으로 목격한 아들이 훗날 찰스 2세(Charles II, 1630~1685)로 즉위했다.

아버지가 처형되자 찰스는 왕위를 주장하며 스코틀랜드로 달려갔다. 그러나 올리버 크롬웰(1599~1658)이 이끄는 의회파 군대에 박살이 나고, 참나무 속에 숨어 목숨을 부지한 뒤 프랑스로 망명길에 오른다. 무려 9년간의 떠돌이 생활. 왕이라 자칭하지만 실상은 유럽귀족들의 집을 전전하며 눈칫밥을 먹는 신세였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1658년 크롬웰이 죽자 공화정이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1660년 의회가 스스로 찰스를 불러들인 것이다. 혁명의 피로감, 군사독재에 대한 염증, 그리고 기득권 세력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이것이 이른바 '왕정복고'(Restoration)다.

찰스 2세 초상화.(위키피디아)
찰스 2세 초상화.(위키피디아)
"나는 잊지 않는다", 그러나 용서는 한다?

망명에서 돌아온 찰스 2세는 뭔가 대단한 복수극을 벌일 것 같았다. 아버지를 죽인 자들이 아직 살아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는 의외로 '브레다 선언'(Declaration of Breda, 1660)을 통해 대사면을 약속했다. 아버지 찰스 1세의 처형 서명자 59명 중 살아 있는 자 대부분을 사면했다. 단, 이미 죽은 크롬웰은 무덤에서 파내 목을 잘라 런던탑에 매달았다. 산 자는 봐줘도 죽은 자는 못 봐준다는, 다소 엽기적인 보복이었다.

이걸 관용이라고 불러야 할까, 영리한 계산이라 불러야 할까. 어차피 처단할 수 없는 상황에 관용을 베푼 척했다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정책은 영국 사회의 내전 후유증을 빠르게 봉합했다. 피가 피를 부르는 악순환을 끊은 셈이다.



1630년 유아 시절의 찰스를 그린 그림.(위키피디아)
1630년 유아 시절의 찰스를 그린 그림.(위키피디아)
쾌락주의자 왕, 그런데 그게 나쁘기만 했을까

찰스 2세에게는 많은 별명이 있다. '쾌락왕'(Merry Monarch), '방탕한 스튜어트'(Merry Stuart)…. 공인된 그의 연인만 최소 13명, 사생아를 최소 14명이나 두었다는 사실은 당시에도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대표적인 정부(情婦)로는 바버라 팔머(Barbara Palmer, 1640~1709), 루이즈 드 케루알(Louise de Kéroualle, 1649~1734), 그리고 배우 출신 넬 그윈(Nell Gwyn, 1650~1687)이 있다.

특히 넬 귀인은 평민 출신 배우였는데, 찰스가 그녀를 총애하자 귀족들이 질색했다. 어느 날 군중이 귀인의 마차를 향해 야유를 퍼붓자, 그녀가 창문을 열고 외쳤다고 전한다.

"진정들 하세요! 저는 가톨릭 정부가 아니라, 개신교 정부예요!"

이 한마디에 군중이 박장대소했다는 일화는 당시 종교 갈등이 얼마나 첨예했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방탕하다고만 볼 것도 없는 것이, 찰스 2세 치하에서 영국은 문화적으로 꽃을 피웠다. 크롬웰의 청교도 공화정 시절 금지됐던 연극, 음악, 축제가 부활했다. 오페라가 처음 영국에 뿌리를 내린 것도 이 시기다. 또한 그는 과학에 열렬한 관심을 보여 1662년 왕립학회에 직접 칙허장을 내렸다. 아이작 뉴턴(1643~1727)이 왕립학회의 울타리 안에서 연구에 몰두할 수 있었던 데에는 왕의 지원이 한몫했다.



윌리엄 돕슨이 그린 찰스의 초상화, 1642년 또는 1643년경.(위키피디아)
윌리엄 돕슨이 그린 찰스의 초상화, 1642년 또는 1643년경.(위키피디아)
종교 문제, 그 끝나지 않는 싸움

찰스 2세의 통치에서 가장 복잡한 대목은 종교다. 그는 공식적으로는 영국 국교회(성공회) 왕이었지만, 어머니 헨리에타 마리아(Henrietta Maria, 1609~1669)는 프랑스 가톨릭 신자였고, 동생 제임스(1633~1701, 훗날 제임스 2세)는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찰스 본인도 임종 직전에야 가톨릭 세례를 받았다.

1672년, 찰스는 '신앙 자유선언'(Declaration of Indulgence)을 발표해 가톨릭 신자와 비국교도(성공회 신자가 아닌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를 완화하려 했다. 의회는 즉각 반발했다. 이듬해 의회는 '심사법'(Test Act, 1673)을 통과시켜 공직자에게 가톨릭 교리를 부인하는 선서를 강제했다. 왕과 의회의 줄다리기는 이렇듯 끊임없이 계속됐다.

이 과정에 터진 것이 이른바 '가톨릭 음모 사건'(Popish Plot, 1678)이다. 타이터스 오츠(Titus Oates, 1649~1705)라는 인물이 '가톨릭 세력이 왕을 암살하려 한다'는 거짓 음모론을 퍼뜨렸고, 영국 사회는 집단 히스테리에 빠졌다. 무고한 가톨릭 신자 35명이 처형됐다. 오늘날로 치면 확인되지 않은 첩보 하나가 소셜 미디어를 타고 퍼져 무고한 사람들이 떼죽음을 당하는 꼴이었다.

찰스는 이 음모론을 믿지 않았지만, 의회와 여론의 압력에 밀려 초기에는 제대로 제동을 걸지 못했다. 권력자가 가짜 정보를 알면서도 대중의 분노를 이용하거나 침묵하는 패턴, 어디서 많이 본 장면 아닌가?



1651년 찰스 2세의 금으로 만든 대관식 메달.(위키피디아)
1651년 찰스 2세의 금으로 만든 대관식 메달.(위키피디아)
의회와의 지루한 줄다리기, 그리고 절대왕정의 꿈

찰스 2세는 아버지처럼 의회에 맞서 정면충돌하는 대신, 우회하고 달래며 속이는 전략을 택했다. 1670년 그는 사촌 루이 14세(1638~1715)와 비밀리에 '도버 조약'(Treaty of Dover)을 맺었다. 핵심은 프랑스로부터 돈을 받는 대신 가톨릭을 지원하고, 때가 되면 가톨릭으로 개종하겠다는 약속이었다. 한마디로 외국 권력자에게서 뒷돈을 받고 국가 정책방향을 흥정한 것이다.

이 사실이 당시 의회에 알려졌다면 찰스도 아버지처럼 단두대에서 목이 잘렸을지 모른다. 그는 끝내 이 비밀을 지키는 데 성공했다. 비밀이 완전히 드러난 것은 사후의 일이었다. 역사란 참으로 뒤늦게 진실을 말하는 법이다.

1681년, 찰스는 의회를 해산하고 이후 죽을 때까지 의회 없이 나라를 다스렸다. 루이 14세의 보조금과 왕실 수입만으로 버틴 것이다. 입법부를 무력화하고 행정권을 독점한 이 4년은, 영국 헌정사에서 '전제의 계절'로 불린다.



망명 시절의 찰스, 필립 드 샹페뉴가 1653년경에 그린 그림(위키피디아)
망명 시절의 찰스, 필립 드 샹페뉴가 1653년경에 그린 그림(위키피디아)
한국에서 읽는 찰스 2세, 낯설지 않은 이야기들

자, 이제 영국 이야기를 잠시 접고 이쪽 반도를 바라보자.

첫째, '위기에서 살아남은 자의 처세'. 찰스는 9년 망명 끝에 복귀해 쿠데타 세력을 오히려 포용했다. 한국 현대사에서도 여러 차례 정치세력이 몰락했다가 '시대의 변화'를 등에 업고 귀환한 장면이 반복됐다. 문제는 그 귀환이 진정한 화해를 의미하는지, 아니면 다음 판을 위한 포석인지를 구별하는 일이다.

둘째, 가짜 음모론의 파괴력. '가톨릭 음모사건'은 한 사람의 거짓말이 수십 명의 목숨을 앗아간 사례다. 확인되지 않은 의혹이 정치적으로 증폭되어 무고한 사람들을 희생시키는 구조는 17세기 영국이나 21세기 한국이나 다를 바가 없다. 다만 지금은 속도가 비교할 수 없이 빠를 뿐이다.

셋째, 외세의존과 주권. 찰스가 프랑스 루이 14세에게 뒷돈을 받고 정책을 흥정한 것은 오늘날이라면 명백한 주권침해 사안이다. 강대국의 이해관계와 국내정치가 뒤엉키는 구조, 한반도 주변의 강대국들과의 관계를 생각할 때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진다.

넷째, 왕립학회와 공공지식. 찰스가 왕립학회를 후원한 것은 단순한 취미가 아니었다. 국가가 지식과 연구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할 때 사회전체가 어떻게 발전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지금 한국에서 기초과학 예산이 어떻게 다뤄지고 있는지를 돌아볼 이유가 충분하다.



찰스가 헤이그에서 영국으로 떠날 때.(위키피디아)
찰스가 헤이그에서 영국으로 떠날 때.(위키피디아)
그는 침대에서 사과하며 죽었다

1685년 2월 2일, 찰스 2세는 갑작스러운 발작으로 쓰러졌다. 나흘의 사투 끝에 임종을 앞두고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말했다.

"이렇게 오래 기다리게 해서 여러분에게 미안합니다."

마지막 순간에도 재치를 잃지 않은 셈이다.

그는 54세로 세상을 떠났다. 적법한 자녀는 한 명도 없었지만 사생아는 14명이었다. 그가 남긴 것은 안정된 왕정복고 체제, 과학과 문화의 부흥, 그리고 풀리지 않은 종교 갈등과 의회 탄압의 유산이었다.

찰스 2세는 영웅도 악당도 아니었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 그리고 권력을 지키기 위해 타협하고 속이고 즐긴 한 명의 인간이었다. 역사는 그런 인간들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역사는 지루하지 않다.

그리고 바로 그래서, 역사는 지금도 반복된다.



대관식 초상화, 찰스는 1661년 4월 23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대관식을 거행했다.(위키피디아)
대관식 초상화, 찰스는 1661년 4월 23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대관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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