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이준 선생(1859.1.21~1907.7.14)
독립운동가 이준 선생(1859.1.21~1907.7.14)
헤이그 밀사로 특파, 일제 침략의 부당함을 알리다.
사람이 산다함은 무엇을 말함이며 죽는다 함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살아도 살지 아니함이 있고 죽어도 죽지 아니함이 있으니 살아도 그릇 살면 죽음만 같지 않고 잘 죽으면 오히려 영생한다. 살고 죽는 것이 다 나에게 있나니 모름지기 죽고 삶을 힘써 알지어라. -선생의 유훈 중에서-
이준 선생은 우리에게 헤이그 특사 3인방으로 잘 알려져있습니다. 하지만 그 외에는 선생에 대해 잘 알려진 부분이 없고 잘 모르는 것 같아 조금더 선생에 대해 알려야 하는 부분이 있어 보입니다.
1875년 서울로 상경한 선생은 당시 형조판서였던 최익현 선생으로부터 재사(才士)로 인정을 받았고 1884년 주변의 기대에 부응하듯 함경도에서 장원급제를 하였습니다. 그 후 선생은 자신의 재산을 털어 경학원을 설립하고 인재양성에 힘썻습니다.
1895년 선생은 처음으로 우리나라에서 설립된 법관양성소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검사가 됩니다. 검사가 된 선생은 관리들의 비행과 불법행위를 밝혀내며 정의로운 세상을 꿈꿧으나 탐관오리들의 중상모략으로 2개월만에 검사직을 그만두게 됩니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제1차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하며 우리나라의 국정에 불법으로 간섭을 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간섭이 일어나자 선생은 반대 시위운동을 벌였으며 특히 일제가 전국의 모든 황무지 개척권을 요구하자 이상설(헤이그특사 3인방중 한명) 선생과 함께 보안회를 조직하여 어느때보다 열정적으로 반대 상소를 올리고 시위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일제는 이를 가만히 보고있지 않았고 보안회를 강제 해산시켜버립니다.
선생은 마치 일제와 밀고 당기기를 하듯 대한협동회를 조직하여 다시한번 황무지개척권을 격렬히 반대하고 실제로 일제의 야욕을 저지시키는데 성공합니다.
일제는 우리의 정신을 분열시키고 내란을 일으킬 목적으로 친일파들의 모임인 일진회를 조직하여 매국활동을 벌였고 선생은 일진회와 정면으로 대결하기 위해 '공진회' 를 조직 회장에 선임되며 반 일진회 투쟁을 전개하였고 이로인해 일제에 체포되어 유배되었습니다.
유배지에서 풀려나 잠시 중국으로 간 선생에게 조국에서 한가지 소식이 전해집니다. 그 소식은 선생을 다시한번 비분강개하게 만들었는데 일제가 이토 히로부미를 서울로 보내고 을사5적을 내세워 을사늑약을 체결하였다는 것과 이로인해 민영환 선생이 자결 순국하였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선생은 다시한번 목숨을 걸고 나라를 되찾기 위한 운동을 하기로 다짐하였고 즉시 조국으로 귀국한 후 을사늑약을 폐기하라는 장문의 상소문을 작성한뒤 격렬하게 시위운동을 벌였습니다.
그 후 선생은 이동녕, 안창호 선생과 함께 비밀결사 신민회를 조직하였고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에 비밀리에 고종황제를 접견하게 됩니다. 이때 고종황제는 선생에게 특명을 내리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평화회의에 가서, 을사조약이 황제의 의사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일제의 협박으로 강제로 체결된 조약이므로 무효라는 것을 세계만방에 알리고 한국독립에 관한 열국의 지원을 요청하라'
여기서 잠시 멈춰 상상을 해 보기 바랍니다. 풍전등화같은 나라의 상황에 왕이 비밀리에 불러 나라의 운명을 나에게 부탁하는 상황. 그리고 이 명령을 수행하는 순간 나와 내 가족이 어떻게 될지 가늠할 수 있는 상황. 그런 만감이 교차하지만 담담하게 결의에 찬 표정으로 결국은 임무를 수행하러 떠나는 발걸음. 그 눈빛과 표정을 상상해보시기 바랍니다.
선생은 1907년 4월 22일 목숨을 걸고 서울역을 떠나 부산항을 거쳐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 이상설 선생과 합류하였고 시베리아 열차를 타고 네덜란드 배째부르그에 도착합니다. 그곳에서 이위종 선생을 만나고 [장서]와 [일인불법행위] 책자를 불어로 번역한 후 인쇄하였고 6월 28일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한 40여 참가국 위원들에게 보낸 뒤 러시아 대표였던 평화회의 의장 넬리도프 백작을 찾아갔으나 네덜란드 정부의 소개가 없다며 문전박대 당하였습니다. 헤이그 특사 3인은 부의장인 네덜란드 전 외무대신 뽀포로를 방문했으나 역시 거절당했고 네덜란드 외무대신 테츠에게 면회를 요청했으나 평화회의에서 발언은 어렵다는 통지를 받게됩니다.
당시 1907년 6월 15일부터 1개월간 진행된 만국평화회의에 참가한 나라를 46개국이고 위원들만 247명에 달했습니다.
이준 선생과 특사 요원들은 여기서 포기하지 않고 넬리도프 의장에게 고종황제의 친서와 신임장을 보여주며 한국대표로서 공식적인 활동을 하려했으나 일본과 영국대표의 노골적인 반대로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요원들은 회의장 앞에 있는 각국 언론인들 앞에서 즉흥 연설을 하기 시작합니다. 요원들은 연설을 준비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이미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과 눈빛은 그 어떤 준비된 글보다 분명하고 정확한 의미를 가르키고 있었으니까요. 선생은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설명하였고 <평화회의보>에 [장서]의 전문을 게재 하였습니다. 이러한 노력이 드디어 성과를 보이게 되었는데 7월 9일 협회에 귀빈으로 초대되어 연설 할 기회를 얻게된 특사 3인방은 당시 불어를 가장 잘 구사했던 이위종 선생으로 하여금 불어로 연설을 주도했습니다. 이위종 선생의 열정적인 호소는 이날 참석했던 각국의 언론인들과 각국대표들을 감명시켜 찬사를 받았지만 국제정세와 일제와 비밀협약을 맺은 국가 대표들의 반대로 한국의 독립청원이 최종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에 분함을 금치 못한 선생은 나라의 운명을 짊어지고 온 막중한 임무를 실패했다는 생각에 조국을 향해 인사를 한 뒤 그곳에서 자결 순국하였습니다.
선생의 유해는 순국 후 55년이 지나, 1963년 10월 4일 조국의 품으로 돌아왔고 온 국민의 애도 속에 국민장을 치른 후 서울 수유리 선열묘역에 안장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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